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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2019.05.20 09:04

기도방지기 조회 수:208

 

희광이들이 안주교의 목을 칼로 한번 내려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동안 꾸물거리다가 그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희광이들이 안주교의 목을 두번째 내리쳤다는 증언이다. 

그동안 그의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서 

그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음을 목격자들이 말하고 있다.

 

 

성령님 퍼내도 퍼내도 다함이 은총의 보고여 !

사랑없음과 교만에서 저희를 보호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를 본 받게 하소서 !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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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주교의 세례명은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이고,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다. 그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그 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가정답게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덕행의 꽃을 피웠던 집안이다. 부모는 그의 억세고도 침착하지 못한 성격을 고치려고 다소 완고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는 사제직에 뜻을 두고 1834년 10월 파리(Paris) 교외의 잇시(Issy) 신학교에서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1836년 10월 파리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르와예(Roye) 본당의 보좌신부로 20개월 동안 사목하다가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교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 위해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어,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하여 8월 24일 외방전교회의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제3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선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 8월 초 상해로 가서 8월 17일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후,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塘)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8월 31일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남 강경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하였다.

   이때부터 1866년 3월에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그는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인 1846년부터 전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백여 명의 교우들을 돌보았고,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일단 활동을 중단하고 습기가 심한 불결한 방에 숨어 살았으며, 그러면서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1848년 박해가 뜸해지자 건강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전교활동을 시작하여 1850년에는 생명이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로 하여금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전교활동을 금하였고, 그래서 그동안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틈틈이 “나선소사전”(羅鮮小辭典)을 편찬하는 등 교우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신심서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 성교 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 등의 번역서라든가,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들 중의 하나이다. 조선 교회사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 파리(Paris)로 보냄으로써 후대의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이것을 기초로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그는 1861년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1865년부터는 내포 지방에서 전교활동을 시작했었는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더욱 가혹해져 마침내 같은 해 2월 23일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잡혀 3월 7일 참수 치명하였다. 그래서 보좌주교였던 그가 주교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체포되어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다블뤼 주교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3월 23일 그가 사형에 처해질 것이 결정되어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송되는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 성 금요일에서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성 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의 소원대로 3월 30일에 성 금요일에 다블뤼 주교는 사형을 받게 되었다. 처형이 시작되자 맨 먼저 다블뤼 주교가 칼을 받았다. 이때 희광이들이 다블뤼 주교의 목을 칼로 한 번 내리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 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동안 꾸물거리다가,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다블뤼 주교의 목을 두 번째 내리쳤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얼마동안 군문효수 되었다가 교우들의 손에 의하여 홍산 땅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갈매못 순교성지

 

 

갈매못 순교성지 기념관 앞에는 야외제대와 그 좌우로 성 다블뤼 주교상과 성 황석두 루카상이 세워져 있다.충남 대천과 광천 중간 지점에 주포(周浦)가 있고 여기서 서해안을 향해 30리쯤 달리면 바다와 만나게 된다. 충청도 수영(水營)에서도 바닷가로 더 나가 광천만이 깊숙이 흘러 들어간 초입, 서해를 내다보며 자리한 순교성지 갈매못. 한국 천주교회 최고의 성지로 꼽을 만한 곳이다.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바닷가에 있는 이 순교성지는 서해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개발되어 있는 성지라는 점에서 꼭 한 번 순례해 볼 만한 곳이다. 특히 일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순교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安) 주교, 오메트르 오(吳) · 위앵 민(閔) 신부, 황석두 루카 · 장주기 요셉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 주교는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Berneux)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됐다가 4일 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다블뤼 주교는 대원군과의 상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신자들이 마구 잡혀 처형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혔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保寧水營)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 네 명은 갈매못으로 향하는 250여 리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됐는데, 여기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가 합세하여 모두 다섯 명이 함께 자진해서 죽음을 향해 떠나갔다.

이들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시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대목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현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5월 6일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1866년 3월 30일, 그해의 성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5위의 성인 중 황석두 루카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4위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했다가 그해 여름 이화만 바오로와 두 아들 그리고 인근 교우촌인 도앙골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현 서짓골 성지)에 안장하였다. 이곳에서 1882년까지 16년간 묻혀 있던 4위 성인의 유해는 브랑 신부에 의해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되었다.

오늘의 갈매못 순교성지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순교자의 후예였던 고 정규량 레오(1883-1952년) 신부가 1925년 인근 신부들과 함께 목격 증인들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순교지를 확인하고, 이듬해에 20평의 땅을 우선 매입해 1929년에 서울교구 천주교 유지재단에 귀속시켰기 때문이다. 그 후 갈매못이 순교성지로 다시 눈길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62년 대전교구 대천 본당이 설립된 후 순교자 현양운동과 함께 1975년 9월 당시 대천 본당 주임이었던 고 정용택 사도 요한(1998년 7월 3일 선종)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순교복자 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이다. 그 후 1985년 9월에 다섯 분의 순교성인 기념비와 야외제단이 세워졌다.



2003년 2월 17일 대전교구는 갈매못을 성지본당으로 설정하고 상주사제를 두어 성지개발과 순례자들을 위한 사목에 박차를 가했다. 2004년 4월 성지 전시관 앞에 다블뤼 안 주교 동상을 건립해 축복하고, 2006년 10월에는 성지 언덕 위에 처형장인 바닷가를 내려다보는 승리의 성모 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가졌다. 2008년 4월에는 기존의 경당과 전시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수리해 갈매못 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로 꾸며 성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2013년 2월 12일에는 갈매못 성지가 ‘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되었고, 2016년 10월 15일에는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순교자 현양대회를 거행하며 승리의 성모 성당 옆에 새로 세운 다블뤼 주교 등 다섯 성인상 축복예식을 가졌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7년 6월 10일)]


 

 

 

신리와 갈매못 - 성인들의 체포와 순교지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당진시 합덕읍 新里)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孫 토마스)을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

신리 성지에 복원된 다블뤼 주교관 모습. 원래는 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였다.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체포되었던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이래 주로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저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備忘記)가 이 곳 신리에서 작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63년 주교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다. 다행한 것은 다블뤼 주교가 그 전에 이미 순교사와 교회사를 정리하여 프랑스로 보낸 점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소재(예산군 봉산명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갈매못 성지 승리의 성모 성당으로 오르는 경사로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 제11처.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새 처형 장소로 결정된 ‘갈매못’(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굳이 이곳까지 순교자들을 끌고 와서 처형한 이유는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여사울의 이존창 생가 터와 신리의 주교 댁은 오랫동안 잊혀져 오게 되었다. 그러나 신리의 주교 댁만은 인근 교우들 때문에 성 손자선이 태어난 곳이며, 다블뤼 주교의 거처라고 알려져 왔다. 이에 합덕 본당의 페랭(Perrin, 白) 신부는 1927년에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이를 매입한 뒤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고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까지도 신리 공소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지금과 같이 함석지붕을 새로 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곳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 터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끈은 오늘의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 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에 다블뤼 주교가 동료인 만주 교구장에게 쓴 1866년 3월 10일자 서한에서 순교자의 마지막 행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내 차례도 올 것이니, 제가 싸움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뒷산에서 바라본 승리의 성모 성당. 순례자가 많을 경우 뒷문을 열고 계단식으로 된 산등성이에도 앉아 미사를 봉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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