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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명서 베드로

2019.08.04 11:07

기도방지기 조회 수:204

수십 번을 죽는다 해도 천주교를 따를 것이오.

우리의 소원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치명하면 곧장 천국에 들어가 진복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행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하며 기뻐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 

 

성령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저희를 가르치시어

하느님께 흠숭과 영광이 되고 또한 영혼의 구원이 되며

성모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

그리하여 하느님의 쓸모 있는 종으로서 죽게 하소서  아멘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이명서 베드로를 본 받게 하소서 !

성 이명서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9.99.jpg

성 이명서ㆍ베드로는 1820년 충청도에서 구교우집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신자였으므로 박해가 

없는 이곳 저곳으로 자연히 옮겨 다니다가 전주 구이지방 고수대에 이사하여 살았는데 다시 전주 성지동 

교우촌으로 옮겨 신자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결혼하여 많은 자녀들을 두었으며 그의 성격은 온화하고 

어진 성품으로 모범적인 가정생활과 열심한 신앙생활로 신자들의 존경과 애호를 받았다. 

후에 그는 가슴앓이로 많은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체포되기 얼마전에 성지동 교우촌 신자들이 다가올 박해를 피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을때 

이 베드로는『사세가 그렇게 다급하게 되었다면 빨리 피하여야지요. 나는 이 병때문에 피하지 못 

할 형편이니 하느님의 안배에 의지 할 따름입니다. 필요하시다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면 내 이 고질병이 영원히 낫게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용감하게 순교의 뜻을 밝혔다.

 

그런차 예상대로 큰 박해가 일어나 1866년 12월 5일 마침내 포졸들이 조베드로(화서)를 체포하고 갑자기 

이 베드로의 집을 덮쳤을 때 그는 잠깐 혼미하여 자신이 신자임을 부인했으나 옆에 있던 조베드로의 간곡한 

타이름과 꾸지람으로 해서 즉시 정신을 되찾아 가다듬고 용기를 발휘하여『내 아까는 무서워서 그랬지만 

사실 나는 천주교 신자올시다』라고 말을 하였다. 이 말은 듣자 포졸들은 그의 온집을 수색하며 책들과 돈은 

어디 두었느냐고 캐물었다. 이 베드로가 책은 가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은 귀로 들어 배웠다고 말하자 포졸들은 참말인가 보려고 주의기도와 성모송을 외어 보게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잠깐 자신의 생명에 대하여 애착이 생겨서 자기가 환자이기도 하거니와 처자들을 생각하여 생명만은 부지해 달라고 포졸들에게 애원하였다. 

그랬더니 늙은 포졸 하나가 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동정심이 생겨 그를 놓아주면서 다를 포졸들에게 들키지 않게 밤을 이용해 도망가라고 말해 주었다.

 

이 베드로는 그이 말만을 믿고 집에 그냥 머물었다가 다음날 아침 다른 포졸들이 다시 도착할 무렵 큰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서 산으로 피하였다. 이를 본 포졸들이 몸이 쇠약하다는 그의 말을 신용치 않게 되었고 그를 쫓아가 체포하여 다시 그의 집으로 끌고 와서 그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친 괴수가 누구냐고 문초하였다. 이에 이 베드로는 자기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준 선생이라고 한다면 자기 부친밖에 없으며 책은 한권도 갖고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포졸들은 그의 애원을 뿌리치고 끌고 나아가 조베드로와 조요셉이 있는 구진퍼리 

주막으로 데리고갔다. 그들이 전주에로 압송되어 그 감사에게 문초받을때 이 베드로는『천주학을 하느냐』고 

묻는 감사에게 그렇다고 확답하며『내 수십번 죽는다해도 천주교를 따를것이오』라고 말하면서 배교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고 다른 교우들을 고발하라고 하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주리형 등 여러가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가슴앓이 환자인 줄 알면서도 감사는 죄수의 손발과 머리를 묶어 고정시켜 놓고 등 허리를 난타했다. 매를 맞을 때마다 그의 손발은 뒤틀려 관절이 모조리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베드로는 경탄할 정도로 용감게 이 

혹독한 고문을 잘 참아 내었다. 그때 함께 갇힌 교우들이 감옥살이로 인해 몸들이 쇠약해지고 거기다 여러번에 걸쳐 잔인한 고문까지 당했지만 이들은 모든 것을 잘 견디어 내고 서로 격려하며 함께 기도를 드릴 뿐아니라 기어이 끝끝내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함께 처형되는 날 전주 숲정이 먼 길을 끌려 가면서도 모두가 한결같이 천국에 들어가게 됨을 기뻐하자 이 베드로는『우리들의 소원이 

이렇게 빨리 성취되라고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는 치명을 마치면 

곧장 천국에 들어가는 진복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행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희열에 넘쳐 

말하였다. 죽음에 임박하여 두려움이 없이 하는 이러한 그의 말은 당시 주위에 있던 외교인들까지도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물론 외교인들은 한마디만 하면 살아날텐데도 거절하는 이 교우들의 확고 부동한 신앙을 

받아들일리 없었다. 정해진 전주 숲정이 처형장소에 이르러 사형에 관한 모든 절차가 끝난후 46세된 이 

베드로는 첫번째 칼에 그의 생명줄이 땅에 떨어져서 숨을 거두었으니 때는 1866년 12월 13일이었다.

 

이 베드로는 병중에 있으면서도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고 배교하기를 거부했다. 또한 혹독한 고문과 

문초에 도그는 확고부동했으며 끝까지 형장에서 참수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그의 인간적인 용덕은 

길이 후손들의 귀감이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1985년 7월 21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자복자회, 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전주 숲정이

 

순교의 땅 전주 지역에는 전동 성당, 풍남문, 치명자산(일명 중바위), 서천교, 초록바위, 여산 순교성지 등

곳곳에 순교자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숲정이’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머리’라고도 하고,

군 지휘소인 장대(將臺)가 있어 조선 시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자부 이순이 루갈다, 조카 유중성 마태오 등 유항검의 가족이 처음 참수되면서부터 순교자의
피가 마르지 않았다.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전주 톨게이트로 빠져 나와 직선으로 뻗은 팔달로를 타거나 천변로를 타고 진북
초등학교를 찾아가면 바로 앞에 숲정이가 나온다. 고속버스를 이용한 순례자들은 터미널에서 택시로
구(舊) 해성 고등학교로 가자면 기본요금 정도로 숲정이에 갈 수 있다.
 
숲정이 처형장이 교회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에 이명서 성인의 손자 이준명이 숲정이
순교터를 매입하면서였다. 그 후 1935년 전동 본당의 이학수 회장이 그 자리에 십자가 순교비를 세웠고,
1968년 순교복자 현양탑이 건립되었다.
 
1984년 9월 20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된 숲정이 순교터는 도시화의 물결로 1960년 전주교구에 의해 설립된 해성 중고등학교가 1992년 삼천동 신축교사로 이전한 뒤 그 자리에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본래의 순교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본래의 장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 내에 새로 성지를 조성하고, 본래의 순교터에서
옮겨 온 토사를 그 위에 덮고 십자가와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순교의 영광을 기리고 있다. 현재 숲정이
성지는 해성 중고등학교 체육관으로 사용하던 윤호관 앞에 조성되었는데, 윤호관 내에는 1997년 전주교구
설정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된 전주가톨릭신학원이 자리하고 있다. 2004년 6월에는
성모자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마련해 축복식을 가졌다.
 
숲정이는 일찍이 유항검 일가가 순교한 이래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도 수많은
신앙인들의 피흘림이 있었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에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12년간
옥고를 치른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이일언 욥, 정태봉 바오로, 김대권 베드로 등 5명이 참수됐다.
이곳에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성 마태오, 그리고 기해박해 때 순교한 5위 모두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1866년 12월 13일(음력)에는 소양면 신리골의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손선지 베드로, 한재권 요셉과
성지동의 조화서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정원지 베드로 등 여섯 명이 치명했는데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1867년에는 김사집
필립보 외에 여러 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치명하기도 했다.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건만 이처럼 많은 교우들은 초개와 같이 세상을 버렸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순교자는 한국 순교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이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며느리이기도 한 이순이 루갈다는 조선 왕조 태종의 14대손으로서
지봉 이수광의 8대손인 이윤하와 권일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터운 신앙의 가계에서 자란 그녀는
성모 마리아를 닮아 평생 동정으로 살기를 결심하지만 이는 당시의 풍속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순이 루갈다의 결심을 알고 있었던 주문모 신부는 호남 전교 길에 유항검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장남
중철 또한 동정으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뜻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혼사를 주선하여,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와 같은 동정부부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 후 4년 동안 오로지 천주의 정배가 되리라는 의지로
정결한 생활을 해 온 이들 동정부부는 마침내 신유박해를 만나 부부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입게 되었다.
 
치명자산 성지 산상 기념성당 벽면에 모자이크된 이순이 루갈다의 편지.전주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 유중철 요한의 처 이순이 루갈다가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숲정이에서 참수되기 직전 옥중에서 친정으로 보낸 편지가 그대로 전해져 한국 천주교회사의 귀중한 보물이 되었다. 옥중에서 옥리의 눈을 피해 그의 여동생과 올케에게 쓴 편지 조각조각이 어느 교우 집에 곱게 간직되어 내려와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전문이 소개됐는데 그 구절구절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우리는 다 같이 천주를 위하여 순교자가 되기를 맹세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나의 애정은 다른 감옥에 갇힌 남편 요한에게로 끊임없이 달려만 갔습니다. 10월 9일 나의 시동생이 끌려 나갔습니다. 얼마 후에 남편과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남편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는 소식에 안도한 이순이 루갈다는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기꺼이 순교의 영광을 택하였다.
 
“고문이 시작되자 나는 천주를 믿음으로써 목숨을 바치겠다고 확실히 말했습니다. 형리는 나의 정강이를 때리고 수갑을 채워 옥에 가두었습니다. 내가 순교자가 된다면 모든 나의
죄는 없어지고 천 배나 만 배나 되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복(福) 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들 동정부부 순교자의 무덤은 지금 전주 시내 어디서나 잘 바라다 보이는 교동(校洞)의 치명자산 성지,

 시민들은 중바위(僧岩山)라고 부르는 산머리 양지바른 자리에 있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낮이나 밤이나’

기도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28일)]


 

 
전주 숲정이와 치명자산
 
'전주 숲정이'(전주시 진북동 1034-1번지)는 조선 시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로, 일찍부터 중죄인들의 형장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곳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터로 변모하였다. 1801년에 이순이와 류항검의 가족이 순교한 이후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충청도 출신의 김대권(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정태봉(바오로)과 경기도 출신의 신태보(베드로) 등 5명이 5월 29일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또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 조화서(베드로), 이명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등 6명이 12월 13일 이곳에서 순교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숲정이는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사적지였다. 이곳은 신앙 선조들의 순교 열정과 함께 천상의 영복을 얻은 기쁨, 피로 적셔진 진토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박해 시대 내내 신자들은 그 자리를 잊을 수 없었고, 신앙의 자유를 찾은 뒤에도 자주 이곳을 순례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이 숲정이 형장이 교회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에 이명서 성인의 손자 이준명(아나돌)이 숲정이 순교 터를 매입하면서였다. 이후 1935년에는 전동 본당의 이학수(바오로) 회장이 그 자리에 십자가비를 건립하였으며, 1960년에는 이곳 이웃에서 해성 중고등학교가 개교하였고, 1968년에는 순교 복자 현양탑이 건립되었다. 또 1984년에는 숲정이 순교 터가 지방 기념물 7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시화의 물결로 1989년에 해성학교가 이전되고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본래의 순교 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지금은 본래의 장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 내(진북동 1034-13번지)에 새로 사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전주시로 들어와 전주천 변에 있는 진북 초등학교를 찾으면 된다.
 
한편 류항검과 가족들이 순교한 뒤 남아 있는 노비와 인척들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초남리 너머에 있는 재남리(김제군 이서면과 용지면의 경계 마을) 바우배기에 합장하였다. 그후 전동 본당이 설립되면서 재남리 공소는 이 본당 관할이 되었으며, 초대 본당 주임 보두네 신부는 자주 이 공소를 순방하는 도중에 바우배기의 류항검 가족 무덤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914년 사순 시기에 땅 주인이 무덤을 이장하도록 권고하자, 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파묘를 하여 순교자 7구의 유해와 이름이 적힌 사기 접시를 확인하게 되었다. 류항검과 부인 신희, 아들 문석과 조카 중성, 제수 이육희, 그리고 동정부부 류중철과 이순이였다.
 
치명자산 성지 주차장과 루갈다 광장 사이에 설치된 순교자 유항검과 동정부부 조각상.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7구의 순교자 유해를 작은 항아리에 각각 담고 이름을 써서 달았다. 그런 다음 전동 성당을 지을 때 재목을 구하기 위해 사두었던 성당 동쪽 기린봉(306m) 자락에 있는 '치명자산'(전주시 대성동 산 11번지)에 이들 일곱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하였으니, 그때가 1914년 4월 19일이었다. 이어 1949년에는 전동 성당 신자들이 치명자산에 십자가 기념비를 건립하고 교구장 김현배 신부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가졌으며, 1984년에는 이 지역이 지방 기념물 69호로 지정되었다. 전주교구에서는 이를 계기로 치명자산 개발 계획을 세운 뒤 1988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95년 기념 성당을 완공하였다.
 
지금까지 이곳 사적지에서는 크고 작은 기적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그것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발된 류항검, 류중철, 이순이 등의 시복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도 커다란 감동을 주게 될 것이다. 석양이 질 때 드러나는 이곳 언덕의 기념 십자가 옆에 있는 바위는 순교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과 비슷하다. 이처럼 치명자산은 더 많은 양들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기 위해 오늘도 전주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그곳에 서 있다. [차기진, 사목, 199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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