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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조화서 베드로

2019.07.21 11:03

기도방지기 조회 수:437

우리는 죽으면서도 진리인 하느님을 신봉하지 않는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령님 영혼안에서 기적을 행하시는분 !

저희를 이끄시어 깨어있는 가운데 완덕의 길을 가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조화서 베드로를 본 받게 하소서 ! 

성 조화서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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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목을 치려는 회자수에게도 전교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14년 수원지방 도마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25세가 되던해 기해교난(1839년)이 

일어나 그의 부친 조안드레아가 순교하자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신창에 이사하여 연명하였다. 

조베드로는 한막달레나를 아내로 삼고 아들 조윤호 요셉(같은해 순교함)을 낳았다. 그는 순교자의 

자손이며 신심 깊은 교우였기 때문에 당시의 선교사를 많이 도왔고 특히 최양업 신부의 복사겸 마부로서 

기거를 같이하며 최신부를 모셨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가 별세한 뒤에 그는 1864년에 전라도 전주에 있는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들어가 살았다. 이곳으로 이사온 후 얼마안있어 아내 한막달레나가 

죽었다. 아내를 잃자 그는 다시 새아내 김수산나를 맞이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조용하게 

신심생활에 몰두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는 본래 성격이 활기차고 명랑했으며 태도가 겸손하고 양순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다른 신자들도 

대부분 신뢰하였다.

 

한편 그는 교우 본분을 충실하게 지켰으며 모범스런 신자가 되었다.

 

조베드로가 살고있는 마을은 타지방 교우들의 체포소식마저 못들을 정도로 첩첩산중의 깊은 교우촌이었다. 

그런데 1866년 병인박해말기에는 깊은산중의 신자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체포했다.

 

마침내 이곳 성지동에도 체포의 손길이 미치게 되었으니 12월 5일 저녁 조베드로가 아들 요셉을 데리고 

이웃집들을 찾아보기 위해 집을 나서 같은교우 박씨네집에 막 다다를 무렵 갑자기 포졸들이 그의 집에 

도착하였는데 조베드로는 자진하여 자기집에 들어가서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를 보고 있던 그의 며느리는 밖으로 달려 나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있는 자기 남편 윤요셉에게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때 조베드로는 자기를 심문하는 포졸들에게 자신이 천주교의 참된 신자라는 것을 

용기있게 말하고 자신이 배운 천주교의 진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부친한테서 직접 교리를 배웠

다고 공공연하게 자백하는 한편 자신과 자기 아들 외에는 천주교 신봉자를 아무도 아는 바 없다고 

확언하였다. 이때 그의 아들 조 요셉이 집으로 들어오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속히 피하라고 여러가지로 

타일렀으나 아들은 이를 완강히 거절하면서 이내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 함께 체포되었다. 이렇게 하여 

부자 함께 묶여 전주로 향하는 도중 여러가지로 수모와 혹심한 천대속에 주막에서 며칠을 묵어가며 

목적지인 전주에 도착한 후 곧 이어 다른 교우들과 함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조 베드로는 먼 길을 끌려 갈때 그의 아들에게 순교의 용덕을 마음깊이 일으켜 주려고 간곡한 말로 아들을 

격려해 주었다. 『요셉아! 결코 뜻을 굽히지 말아라 원님앞에 가서도 기어이 진리만을 대답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마음이 허약해져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타일렀다. 그러면 또 아들이 아버지한테 『종교적 

신념을 버리지 마시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부자간에 오가던 말을 듣고 있던 외교인들마저도 이들의 굳은 

신앙심에 놀라 경탄을 금지 못했다고 한다.

 

조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서도 함께있는 다른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를 시켰다. 그뿐 아니라 그는 죽인다고 협박하며 배교를 강요하는 원님에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교리서를 갖고있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또다른 고문을 혹독하게 당했지만 끝내 다른 교우의 

고발이나 교리서의 근거지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고문을 받은 얼마후 그가 곤장을 맞고있을때 

옆의 안면있는 한 외교인을 불러 자기집에 있는 책들을 다른 곳에 좀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며칠후 포졸들이 조베드로를 앞세우고 그의 집에 오자 그의 젊은 며느리가 우는 것을 보고 『왜 우느냐? 울 이유가 도대체 

없지 않으냐? 나는 곧 천국으로 떠날 사람이다. 그러니 그리움을 그만두라』고 타이르기까지 하였다.

 

그후에도 계속 다른 교우들을 고발하라고 할때마다 조베드로는 전혀 아무도 모른다고 완강히 거절하곤하였다. 그는 또한 모진 감옥살이 중에서도 늘 동료 교우들에게 신앙을 배교치 말라고 충고하는가 하면 그가 처형되는 날도 『우리는 오늘 천국에 가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정바르톨로메오 문호에게는 『우리가 받을 

행복이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충만하고 놀라운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격려하였다. 그

리고 자기 아들 감방을 지나칠때마다 천국에서 곧 함께 만날 것을 상기시키며 굳이 신앙을 지키고 배교하지말라 당부하기도 하였다. 사형장에 도착하자 조베드로는 침착하게 순교할 준비를 다 갖춘 다음 회자수(휘광이)한테 목을 내다주기에 앞서 십자성호를 정성껏 긋고나서 『이곳 처형장에서까지도 흉폭한 그대여, 천주교를 좀 믿어보시오. 우리는 죽으면서도 진리인 하느님을 신봉하지 않는가』라고 반복한 다음 다시한번 성호를 놓은 후 목을 내밀면서 장엄하게 세찬 칼을 세번 받고 그의 머리는 땅에 떨어졌지만 결국 그는 영생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때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52세로 순교하였다.

 

[가톨릭신문, 1985년 7월 7일, 김옥희 수녀(한국순교복자회, 오륜대 순교자기념관장)]

 

 

 

[신앙의 땅] 대전교구 온양 남방제 성지
성 조화서 베드로와 성 조윤호 요셉 부자가 나고 자란 곳

 

 

포근한 바람이 간간이 부는 날, 큰 도로변을 따라 맑은 저수지가 나오고 오른편 작은 솔발 사이에 자리 잡은 온양 신정동성당(주임신부 이원효 베네딕토, 

충남 아산시 신창면 서부북로 763-42) 관할의 ‘남방제 성지’를 찾았다. 깔끔한 

연록의 철 울타리 안에 순교자 신앙비와 성지 안내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방제’라는 말은 제방 둑이 ㄱ자로 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에는 

200여 년이 넘는 버드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오래 전에 형성된 듯하다. 지금은 제방 둑의 각이 많이 완화되고 매몰되어 작은 방죽이 되어버린 이곳은 조화서 베드로 성인과 그의 아들 조윤호 요셉 성인이 태어나 살고 성장한 곳이다. 주변의 성지로 ‘홍성(홍주) 순교성지’와 ‘공세리 성지’가 있으며, 박해시대에 선교사들이 자주 왕래했다는 용담포(선장면 가신리 포구)도 있다.

 

2010년 한국 주교회의에서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책자를 발행하면서 ‘남방제 성지’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성지에 관한 표지석이나 조형물도 

없고, 책자에 소개된 사진과 장소도 잘못되었다. 특히 마을 사람이 성지 비석이 아닌 마을 비석을 세워 혼란을 주었고, 명칭 또한 바르게 표기되지 않았다.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두 분 성인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 온양 신정동성당에서는 2014년부터 교회 문헌과 

여러 자료를 참조하여 성인들이 살고 태어난 근처의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성지를 조성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마침내 순교자 신앙비를 안치하게 되었다. 지난해(2016. 12. 

12) 대전교구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가 ‘남방제 성지’ 봉헌 미사와 함께 순교자 신앙비를 축복하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남방제 성지’가 탄생한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을 도와

 

조화서 베드로 성인은 그의 아버지 조 안드레아(1839. 기해박해)가 순교한 후에 ‘수원 도마지’에서 남방제로 

이주하여 살았고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조윤호 요셉 성인(1848)을 낳아 성가정을 이루었다. 조 베드로 

성인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마부와 복사로 선교 활동을 돕고 전국의 신자 촌을 

모시고 다녔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도(道)와 5천여 리(里)를 걸으며, 많은(3815명) 신자를 방문하였다.

 

순방 중에 포졸들의 습격과 외교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수없이 쫓겨나고 붙잡혀서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경신박해(1860) 때, 갇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한국이름 장경일)’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고, 그 길에 최양업 신부가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친 아주 위급한 상황을 알린 이가 바로 조 베드로 성인이었다.

 

최양업 신부 선종(1861) 후에 베드로 성인은 남방제로 돌아와 살다가 1864년 전라도 전주의 성지동(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깊은 산골의 교우촌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는 늘 낙천적이고 천주교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신자로서 의무를 충실히 하고,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포졸들에게 아들과 함께 체포(1866. 12. 5) 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고 감옥에서 교우들을 만났을 때, 순교를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도록 격려하였는데, 이로 인해 더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함께 

체포된 아들에게 천국에서 서로 만날 것을 다짐하며 전주 숲정이(1866. 12. 13. 52세)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3대가 순교의 영광을

 

아들 조윤호 요셉(1848-1866. 12. 23) 성인은 남방제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아버지 조 베드로 성인을 따라서 교우촌(전라도 전주 성지동)에서도 살았으나 포졸들에게 자진하여 아버지를 따라 함께 체포(1866. 12. 5) 

되어 사형장으로 압송되자 자신도 함께 데려가 달라며 간청했지만, 당시 형법에는 아버지와 아들을 같은 

곳에서 한 날에 처형할 수 없다고 거절되었다.

 

그 후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굳세게 신앙을 지켰고 가혹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으며, 신앙의 강한 빛을 보여준 아버지를 따라 전주 서천교(1866. 12. 23.)에서 모진 매를 맞고 노끈으로 목 졸려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로 부친이 순교한 지 열흘 만이었다. 따라서 조부 조 안드레아, 부친 조 베드로에 이어 손자 조윤호 요셉까지 3대가 순교로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누렸다.

 

지금껏 남방제 성지를 조성하기까지 많은 기도와 정성으로 고생한 신자들과 신정동성당 이원효 베네딕토 주임신부는 남방제 성지를 방문한 순례자들에게 “그동안 많이 송구스러웠는데 이제 더 많은 분들이 찾아와 이곳에서 좋은 신앙의 빛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요한 18,37)

 

◇ 남방제 성지 안내 : 온양 신정동성당 (전화) 041-534-2324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4월호, 이인자 엘리사벳(대전 R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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