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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의배 마르코

2019.05.06 10:20

기도방지기 조회 수:154

 

이역만리 낯선 땅에 와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며

모욕과 멸시와 학대를 달게 받고 있으니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가?

자기들을 죽이려고 날뛰며

악의에 찬 조소를 퍼붓는데

오히려 웃는 낯으로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이처럼 그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성령님 타오르는 사랑의 불가마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지혜와 인내로써 살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정의배 마르코를 본받게 하소서 !

성 정의배 마르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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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의배 마르코(Marcus)는 서울 창동의 어느 양반집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진실하며 행동이 신중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은 유학을 숭상하였기에 오로지 사서오경을 외우며 과거공부에만 전념하였다. 과거 공부를 마친 후 서울의 어느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살다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도 없이 홀로 생활하였다.

   1839년에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모방(Man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순교하는 모습을 새남터에서 보게 되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와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며 모욕과 멸시와 학대를 달게 받고 있으니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인가? 자기들을 죽이려고 날뛰며 악의에 찬 조소를 퍼붓는데 오히려 웃는 낯으로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이처럼 그의 의문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고, 자기가 닦아온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제껏 나는 천주교 신자가 되면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보았었지만, 이제 알고 보니 진정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세 입교하여 조선 교회의 훌륭한 일꾼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1845년에 입국한 페레올(Ferreol, 高) 주교는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죽는 날까지 모든 열성과 신심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기에 ‘산 성인’이라 할 정도로 신자들을 잘 이끌고, 예비자들을 잘 준비시키며, 병자들을 방문하고, 먹을 것조차 없어 고생하면서도 버려진 고아들을 데려다가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는데 그에게 값진 옷이라곤 한 벌도 없었고, 군데군데 깁고 또 기운 헌 옷을 입었고, 조금 들다가 그만 밥상을 물리곤 하였다. 그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를 자기 집에 모셔 들여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순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로다. 반면 자기 집에 앉아 안일하게 죽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1866년 2월 2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처음에는 감옥에 갇혔으나 의금부로 넘겨졌고, 3월 5일에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같은 달 11일에 처형되었다. 사형 길에 나선 정 회장은 눈을 내리 뜨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윽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11일로 바로 그의 72회 생일날이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들의 아버지'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우며 기다릴 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벗이나 존경하는 스승이 계십니까? 그렇게 그립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분이 계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은혜롭게도 우리나라 천주교 창립 초기에 신분과 계층,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신앙인의 가슴에 별처럼 빛나는 분이 계셨고, 모진 박해 속에서도 마음에 사무치는 분이 계셨습니다.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이 조선에 입국하였을 때, 너무도 열렬한 신앙과 갈고 닦은 덕행을 지니고 계시는 이분을 보시고 그를 서울 회장에 임명하셨는데, 그분은 이 직책을 죽을 때까지 모든 이에게 유익하게 수행하셨습니다.

 

베르뇌 주교님은 이분에 대하여 일종의 경외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증언하셨습니다. “저 노인을 보시오. 저분의 날들은 완전하고 저분의 길은 바릅니다. 나는 천국에서 저분의 자리만큼 훌륭한 자리를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열성은 놀라웠습니다. 끊임없이 신자와 예비신자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그들에게 성사 받을 준비를 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항상 변함이 없고 입술에는 늘 미소를 띠고 주야를 막론하고 그를 부르는 사람들을 도와줄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가 성내는 것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하였지만 신자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으려 하지 않았기에 그의 식탁은 간소한 정도를 지나쳤었다고 합니다. 모든 신자가 그를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성인처럼 공경하였습니다.

 

노령화 시대, 노인은 많으나 어른이 그리운 우리 시대입니다. 그리운 그분, 세상에서 이미 신자들이 성인처럼 공경했던 그분, 아버지처럼 사랑했던 그분은 지금 순교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특별 희년에 생각나는 성인,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들의 아버지’라 부를 만한 그분, 바로 정의배 마르코 성인이십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정의배는 서울 창동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유학을 가풍으로 살아온 집안 출신인 그는, 천주교의 제사 금지 등에 대해 반대하였기에 천주교가 박해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천주교를 증오하지는 않았어도 유학자로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문에 능통해서 작은 서당을 세워 학동들을 가르쳤습니다. 결혼은 했으나 일찍 상처하여 자식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1839년 우연한 기회에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순교를 목격하고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죽음의 형장으로 가면서도 기쁨에 넘쳐 있는 세 성직자의 최후와 신자들의 모습에 감동했던 것입니다. 한 마리 새도 죽음에 이르면 그 우는 소리가 슬프다고 하는데 어찌 사람이 그토록 평화롭고 의연할 수가 있는지! 그렇게 놀라운 힘을 내게 하는 이 종교에 대해 더할 수 없는 호기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정의배는 천주교 교리책을 구해 읽었고, 천성이 곧은 그의 마음은 성령의 인도에 힘입어 이내 진리를 깨달아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천주교인은 좋은 사람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나는 정말 착한 사람이 되려면 천주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부르짖으며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1845년 한국에 도착한 페레올 주교가 그의 신앙과 덕행을 보고 그를 서울의 회장으로 임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도 가난했지만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가 몇 주일씩이나 먹이고 재워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854년 고아 구호 단체인 성영회가 조직되자 이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성영회는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올봉 장송(Holbon Janson)이 창설한 고아 구호 단체로 죽을 위험에 처한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주고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양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기구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성영회가 소개된 것은 1852년 말 입국한 메스트르 신부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1854년경부터 어린아이들을 신자 가정에 맡겨 양육하도록 하고 대세 줄 사람을 임명하는 ‘성영회’ 사업을 전개했는데 정의배 마르코는 이 일을 맡아 아버지처럼 고아들을 돌보았습니다.

 

이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이 사업을 체계화시켰고,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던 사업은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재개되어 1885년 3월 서울 곤당골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1887년 7월에는 한국의 고아 사업을 담당할 수녀들을 파견해 줄 것을 프랑스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요청하였습니다. 이 요청에 응답하여 이듬해에 도착한 수녀들은 블랑 주교로부터 서울의 고아원 운영을 위탁받았습니다.

 

그래서 1894년에는 제물포에, 1915년에는 대구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게 되었으니 현재의 인천 해성보육원과 대구 백합보육원의 아득한 여명을 밝힌 한국의 고아들의 첫 아버지가 정의배 마르코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여교우와 재혼을 했는데 부인은 남편의 뜻에 온전히 따라 그의 보잘것없는 수입으로 지극히 가난하면서도 밤이나 낮이나 도움을 청하는 교우들을 지칠 줄 모르고 돌보며 항상 남편과 함께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더욱더 정의배 마르코를 사랑하며 존경했습니다.

 

그는 항상 기도와 묵상으로 영혼의 힘을 성숙시키며 순교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주 말했습니다. “순교라는 것은 좋은 것이다, 자기 집에서 편안하게 죽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들 훌륭한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어 처조카 피영록 바오로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정의배 마르코는 1864년경에 베르뇌 주교 댁에서 다블뤼 주교를 만났으며, 수철리에 사는 배치서와 공덕리에 사는 정복길과 이덕산에게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1865년 5월 입국한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을 때 양자 피영록이 브르트니에르 신부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습니다.

 

정의배의 집에는 볼리외 신부, 위앵 신부, 도리 신부도 왕래하여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신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높은 학덕을 바탕으로 선교사들을 돕고, 주위의 많은 교우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맡아, 주야를 가리지 않고 헌신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 대박해가 시작되자 젊은 양자 피영록을 피신시켰으나 정의배 자신은 베르뇌 주교가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었던 이선이의 밀고로 그해 2월 25일 새벽 집에서 체포당했습니다. 그가 포도청으로 압송될 때 그의 어깨에는 죄인을 표시하는 붉은 오라가 걸려만 있었습니다. 주교가 체포된 뒤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지키고 신자들을 도와주려고 숨지 않았던 그는 그렇게 자기 집에서 체포당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고아원(성영회)이 설립되자 성인은 원장이 되었으며 자선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림 탁희성 화백.

 

 

군졸 2명이 그의 옷소매를 잡고 있는 것을 보고 포장은 말했습니다. “이 점잖은 노인을 혼자 걷게 내버려두어라. 이분이 도망칠 염려는 조금도 없으니 그저 호위만 하고 또 너무 걷지도 말자.” 정의배 마르코의 위엄에 포장도 감복했던 그때, 그의 나이는 일흔두 살이었습니다.

 

그는 포도청에서 두 번의 심문을 받았고 의금부로 옮겨져 네 번의 심문을 받고 모진 매를 맞았습니다. 형리들은 심문을 하며 동료 교우들을 밀고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미 죽은 신자들의 이름만 진술하고 단 한 사람도 밀고하지 않았습니다. 형리들은 이에 분노하여 더 혹심한 형벌을 가했는데, 모진 매를 견디며 그는 다만 순교의 굳은 의지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냈습니다.

 

거듭되는 포도청의 심문에서 그는 관장에게, “나으리의 눈에는 천주교를 믿는 것이 죽어 마땅한 죄로 보이는데, 저는 그 죄를 저질렀고 또 그 죄를 고집하고 있으니 저를 죽여주십시오.” 하고 거듭 아뢰기만 했습니다.

 

결국 정의배 마르코는 1866년 3월 10일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처형은 바로 다음 날인 3월 11일에 군문효수형으로 집행되었습니다. 그는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와 그가 교리를 가르쳤던 제자 우세영 알렉시오와 함께 새남터에서 72세로 순교하였습니다.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이 거룩한 노인은 순교지로 갈 때 눈을 아래로 뜨고 입으로는 기도문을 외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는 103위 순교 성인 중 남자 최고령 순교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는 네 번째 칼에서야 떨어졌습니다. 휘광이들은 “정의배는 효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국왕의 명에 따르지 않고 그의 머리를 사흘간 효수했습니다. 그때 그는 머리카락이 없는 대머리여서 수염으로 매달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나중에 돈을 주고 그의 귀중한 시신을 빼내 와 정중히 매장하였습니다.

 

정의배 마르코는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한국에서 시성되었습니다.

 

[평신도, 2016년 봄(계간 51호), 김길수 사도 요한(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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