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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2019.03.10 11:38

기도방지기 조회 수:405

"차마 죽일 수 없어 본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떠한가"? 라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습니까?

생사에 구애를 받아 변심하지 않으렵니다.” 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성령님 저희의 미래 또한 아시는분 !

제가족과 친구와 은인들과 모든이를 당신 보호에 맡기나이다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를 본 받게 하소서 ! 

성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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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신부의 세례명은 유스투스(또는 유스토)요, 한국 성은 백(白)이다. 그는 1838년 2월 28일 프랑스 디종(Dijon) 교구 관할인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에서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안나(Anna de Montcoy)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이 이미 8년 반 전에 사망한 터였으므로 태어나자마자 장남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매우 신심 깊은 어른이었기에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늘 뒷바라지하였다.

   그러던 중 1859년에 브르트니에르는 파리(Paris)에 있는 성 쉴피스(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1861년 7월 25일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로 편입하였다. 그는 1864년 5월 21일 성품성사를 받았고, 첫 미사를 지낼 때에 순교의 특은을 기도하였다고 한다. 1864년 장상이 조선 선교를 명하자 그는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위앵(Huin, 閔)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등과 함께 본국을 떠나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조선 입국을 위해 상해, 요동 등을 거쳐 많은 고난을 겪은 끝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1865년 5월 27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이 서울에 있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연락할 방도를 찾던 중, 마침 다블뤼(Daveluy, 安敦伊) 부주교의 집에 화재가 나서 바로 그곳 내포 지방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다블뤼 부주교의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를 대면한 후 정의배 회장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그는 한국말을 배우며 베르뇌 주교를 도와서 밤을 이용하여 전교활동을 막 시작하여 80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4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1866년 2월경 뜻하지 않은 대박해가 일어났다.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곧 지방에 있는 모든 동료 성직자들에게 이 놀라운 박해 소식을 인편을 통해 알리고, 24일에는 그도 체포될 각오를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마지막 미사를 올렸으며, 25일에는 정의배 회장이 체포되었고, 27일에는 이선이의 고발과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도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 않은 채 순순히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옥사장에게 “나는 조선 사람인 여러분들의 영혼을 구해주려고 나왔으므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소.”라고 하여 베르뇌 주교가 갇힌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대원군은 브르트니에르 신부에게 별로 문초나 심문을 하지 않은 채 그냥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은 그에게 “차마 죽일 수 없어 본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습니까? 생사에 구애를 받아 변심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드디어 그는 베르뇌 주교와 같은 날인 1866년 3월 6일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7일에 사형 집행 장소인 새남터로 향하였다. 그리고 새남터에 도착하여 귀에 화살을 꽂고, 조리 돌리는 등의 형벌을 받으면서 사형절차를 기다리는 중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심한 갈증 때문에 물을 청하니 동정심 많은 한 병졸이 물을 주려고 하였다. 그때 다른 병졸 하나가 “곧 죽여야 할 죄인에게 물을 주어서 무엇 하겠는가?” 하면서 그 물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다.

   끝으로 그는 베르뇌 주교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다음 베르뇌 주교의 참수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런 후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어 네다섯 번 내리친 칼날에 참수되어, 그가 어릴 때부터 갈망해오던 순교자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고,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신부의 세례명은 유스투스(또는 유스토)요, 한국 성은 백(白)이다. 그는 1838년 2월 28일 프랑스 디종(Dijon) 교구 관할인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에서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안나(Anna de Montcoy)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이 이미 8년 반 전에 사망한 터였으므로 태어나자마자 장남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매우 신심 깊은 어른이었기에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늘 뒷바라지하였다.

   그러던 중 1859년에 브르트니에르는 파리(Paris)에 있는 성 쉴피스(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1861년 7월 25일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로 편입하였다. 그는 1864년 5월 21일 성품성사를 받았고, 첫 미사를 지낼 때에 순교의 특은을 기도하였다고 한다. 1864년 장상이 조선 선교를 명하자 그는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위앵(Huin, 閔) 신부, 도리(Dorie, 金) 신부 등과 함께 본국을 떠나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조선 입국을 위해 상해, 요동 등을 거쳐 많은 고난을 겪은 끝에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1865년 5월 27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이 서울에 있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연락할 방도를 찾던 중, 마침 다블뤼(Daveluy, 安敦伊) 부주교의 집에 화재가 나서 바로 그곳 내포 지방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다블뤼 부주교의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를 대면한 후 정의배 회장 집에 거처를 정하였다. 그는 한국말을 배우며 베르뇌 주교를 도와서 밤을 이용하여 전교활동을 막 시작하여 80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4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1866년 2월경 뜻하지 않은 대박해가 일어났다. 2월 23일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곧 지방에 있는 모든 동료 성직자들에게 이 놀라운 박해 소식을 인편을 통해 알리고, 24일에는 그도 체포될 각오를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마지막 미사를 올렸으며, 25일에는 정의배 회장이 체포되었고, 27일에는 이선이의 고발과 안내로 브르트니에르 신부도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 않은 채 순순히 포도청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옥사장에게 “나는 조선 사람인 여러분들의 영혼을 구해주려고 나왔으므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소.”라고 하여 베르뇌 주교가 갇힌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대원군은 브르트니에르 신부에게 별로 문초나 심문을 하지 않은 채 그냥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은 그에게 “차마 죽일 수 없어 본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습니까? 생사에 구애를 받아 변심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드디어 그는 베르뇌 주교와 같은 날인 1866년 3월 6일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7일에 사형 집행 장소인 새남터로 향하였다. 그리고 새남터에 도착하여 귀에 화살을 꽂고, 조리 돌리는 등의 형벌을 받으면서 사형절차를 기다리는 중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심한 갈증 때문에 물을 청하니 동정심 많은 한 병졸이 물을 주려고 하였다. 그때 다른 병졸 하나가 “곧 죽여야 할 죄인에게 물을 주어서 무엇 하겠는가?” 하면서 그 물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다.

   끝으로 그는 베르뇌 주교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다음 베르뇌 주교의 참수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런 후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어 네다섯 번 내리친 칼날에 참수되어, 그가 어릴 때부터 갈망해오던 순교자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고,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병인년의 선교사들

 

남종삼 요한이 처형된 후 가족을 노륙지전(?戮之典)에 처하라는 상소가 거듭되었으나 왕명으로 각하되었다. 남편 또는 아버지의 죄로 아내 또는 아들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죽이는 것을 ‘노륙’이라고 했다던가.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토록 혹독한 형벌을 내리라고 했던 것일까. 결국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공주진영(公州鎭營)으로, 맏아들인 규희(揆熙)는 전주(全州)진영으로 잡혀가 마침내 공주와 전주에서 순교했고, 아내 이소사와 둘째 명희(明熙)와 두 딸은 응좌죄인(應坐罪人)으로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어 노비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이소사도 창녕에서 순교함으로써 남종삼 가문은 3대에 걸쳐 그 자신을 포함해 4명이 천주신앙으로 순교했다. 남요한은 1968년 10월 6일 24위 병인(丙寅) 순교자 시복(諡福)으로 복자가 되었고, 1984년 5월 6일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의 시성(諡聖)으로 성인 반열에 올라 온 세계 교회의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모반부도(謀叛不道)의 그의 죄명은 1885년에 취해진 조선왕국의 복권조치(復權措置)로 탕척(蕩滌)되었다.

 

병인박해를 흔히들 ‘대원군 박해’라고 하는데,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아들 재황(載晃)이 조선왕조 제25대 국왕 철종(哲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 1863년의 일이었고, 이때 새 임금〔高宗〕이 겨우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아 친아버지인 흥선군이 ‘대원군’으로서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고, 3년이 지나고 나서 1866년 병인년 이후 2~3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가해졌으므로 그렇게들 말하는 모양이다.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이후 가장 많은 교우들이 피를 뿌리고 순교한 박해가 이 병인박해이고, 가장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순교한 박해 또한 이때의 박해였다.

 

한동안 천주교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대원군이 어찌해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 박해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던 것인가. 국경을 위협하던 러시아인들이 물러간 것이 첫째 요인으로 손꼽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조두순, 정원용, 김병학 등 대신들이 정치공세를 강화하며 대원군이 천주교와 접촉하려는 것을 비난하고 나섰던 것도 큰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서양 오랑캐와 천주교도를 모두 죽이자”며 대들었다. 그랬다가는 우리가 침범을 당할 것이라고 하자, 그들은 “아니올시다.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우리는 벌써 서양인 여럿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누가 일찍이 그들의 죽음을 보복하려고 했습니까.”라며 따지고 들었다.

 

“우리는 벌써 서양인 여럿을 죽였고, 누가 일찍이 그들의 죽음을 보복하려고 했습니까.”라고 한 데 이어 “우리가 그 때문에 무슨 손해를 입었습니까”라며 조정 대신들이 대원군에게 말한 것은 27년 전인 1839년 기해박해 때 조선교회 두 번째 감목이던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와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등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세분 선교사들의 처형, 곧 순교를 일컫는다. 또 어쩌면 여러 시기에 해안에서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난파자들을 암시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한 태도를 바꾼 이유 가운데 또 한 가지는, 그에게 정치기반이 약했으므로 대신들과 척을 질 수가 없었던 것도 들 수 있다. 아무튼 대원군은 굴복해서 서양인 주교들을 포함한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판결과 천주교인들에 대한 국법 시행에 서명하고 말았다.

 

페레올 고 요한 주교에 이어 네 번째 조선교회 감목을 맡고 있던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는 대원군이 불러주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교회 사정이 훨씬 좋아질 거라는 기대를 안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양력 2월 14일 포졸들이 두 차례에 걸쳐 주교댁(主敎宅)에 나타났다.

 

“대원위대감께오서 짓고 계시는 대궐을 위한 추렴을 거두려고 왔습니다요.”

 

대궐이란 중건사업을 추진 중이던 경복궁을 말하는 것이고, 두 번에 걸친 이 조사로 주교 복사이던 홍봉주 토마스는 덜컥 겁이 나서 포교지의 재산과 가장 귀중한 물건들을 보관해둘 은밀한 장소를 찾아봤으나 얼른 나타나지를 않았다.

 

“주교님,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좋은 기별이 아니라, 그 반대의 소식이 당도할 것만 같사옵니다. 피신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조정에서 나를 찾고 있으니, 만일 내가 숨으면 사방을 수색할 것이고, 따라서 전반적인 박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2월 22일과 23일에 걸친 밤에 포졸이 또 와서 사다리를 놓고 담장 위에 올라가더니 집안 구조를 샅샅이 살피는 것이었다. 이날 밤 사다리는 베르뇌 주교의 하인인 이선이가 제공한 것이었는데, 그는 자기 주인을 넘겨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알고 있던 다른 선교사들도 밀고했다. 23일 오후 4시 포졸 떼가 집에 들이닥쳐 곧장 안방으로 달려가 오라로 주교를 묶었다. 주교가 도무지 저항할 생각조차 않는 것을 본 그들은 즉시 포승을 푼 채 그를 포청으로 데려갔다.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된 103위 한국 순교복자 시성 미사 강론을 통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파리외방전교회의 프랑스인 선교사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찬탄과 감사의 뜻을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면서 “그들은 이역만리 먼 길을 와서 복음적 열성으로 새로 태어난 교회의 믿음을 심화해주고, 주교직과 사제직의 특은으로써 신앙공동체에 교회적 구조를 갖추어 줌으로써 신자들에게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범교회 안에서 제자리를 찾게 했던 것”이라고 말하고, 특별히 이 땅에 입국한 첫 주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범 라우렌시오 주교와, 교우들에게 교리와 신심을 돕는 책을 펴내는 데에 힘쓴 장 시메온 주교, 두 분을 거명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밖에도 열 분이나 되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열성과 순교를 경탄하는 바입니다. 이분들과 함께 두 분 주교는 박해 하에 믿음을 굳건히 해주고 사제성소를 키우는 데에도 힘쓰면서 밤낮없이 복음전파에 몸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 중에 한 분인 장 시메온 주교는 병인박해 첫머리에 붙잡혀 대신과 좌우 포도대장이 배석한 자리에서 신문을 받았다.

 

“배교하시오!”

 

“천만의 말씀이오. 내가 영혼들을 구원하는 종교를 전하려고 왔는데 나더러 그 종교를 배반하도록 하다니요!”

 

“복종하지 않으면 당신은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할 것이오.”

 

“마음대로 하시오. 이제 쓸데없는 신문은 그만두시오.”

 

위협에 이어 과연 고문이 뒤따랐다. 그들은 주교에게 다리를 몽둥이로 치는 고문과 옆구리를 몽둥이로 찌르는 고문을 가했다. 오래지 않아 다리의 살점이 떨어져나가 뼈가 드러나고 무섭게 으스러졌다. 형벌이 끝나고 기름종이와 헝겊 조각으로 다리를 싸매 옥으로 다시 데려갔다. 그 다음날도, 또 여러 날 동안 몇 차례에 걸쳐 같은 일이 벌어졌다.

 

고통은 물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위해 바쳐졌다. 그런데 어찌해서 인간이 인간을 이토록 모질게 다룰 수가 있단 말인가. 무슨 권리로, 누가 이렇게!

 

“무엇하러 조선에 왔소?”

 

“이 땅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 나라에 온 지 몇 해나 되느냐는 신문에 주교는 대답했다.

 

“십년이 되오.”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겪으면서 주교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물론 하느님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인간적인 고뇌가 없을 수 없고, 두고 온 고향과 부모 형제인들 어찌 생각나지 않았을까. 우리가, 한국 천주교회가 오늘날 인구대비 20%의 복음화를 겨냥하면서 이토록 큰 성장을 보게 된데 따른 감사로서 외방의 선교사들을 제외할 수 없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창설기의 한국교회는 한국인 스스로가 노력해서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그 씨앗을 틔우고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외국 선교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디딘 선교회는 파리외방전교회였고, 성직자를 청하는 한국 신자들의 목소리와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1831년 조선교구의 설정을 보았을 때 흔쾌히 응답해 한국에 진출한 파리외방전교회는 특히 한국교회 최초로 신학생을 선발해 유학을 보내고, 신학교를 설립하는 등 사제 양성과 교회 체계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1900년대 들어 한국 신자수가 4만여 명으로 늘고 사제 수도 53명에 이르렀을 때, 그 중 41명의 사제가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일 정도였으니, 초기 교회 발전에 이 전교회의 도움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해박해 때와 마찬가지로 병인박해 때 역시 감목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주교였고, 브뤼기에르 소주교와 앵베르 범주교, 페레올 고주교에 이어 제4대 조선대목구 장인 시메온 베르뇌 장주교는 병인년 이른 봄, 죽음을 앞둔 서울 감옥에서 어머니와의 이별을 떠올렸다.

 

“하느님께서도 아시지만, 저는 어머니께 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으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흘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 희생은 하느님의 뜻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희생은 어머니도 요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제 성소에 불충실한 것을 보시기보다는 차라리 제가 천만번 죽은 것을 보는 것을 더 낫게 여기실 것입니다.”

 

시메온 베르뇌 장경일(張敬一) 주교. 프랑스 르망교구의 샤토뒤르와르에서 1814년 5월 14일에 칼 만드는 직업을 가진 아버지와 열심한 신자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프레시니에 소신학교와 르망 대신학교를 나온 그는 성적이 우수해서 철학 복습 교사가 됐고, 1837년 5월 20일 사제품을 받은 다음 즉시 철학 강좌의 교수로 임명됐다. 어려운 직책에 열성을 다하면서도 베르뇌 신부는 다른 한편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선교 사도직에 대한 신비로운 부르심에 귀가 열려있었다.

  

그것은 착각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선교사 성소였을까? 영적 지도신부는 하느님께서 그를 전교지방으로 부르시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때부터 베르뇌 신부는 오직 한 가지 뜻만을 세우기로 했으니, 이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주교는 이 철학교수가 교구를 떠나려는 것을 마지못해 허락했고, 그래서 베르뇌 신부는 1839년 7월 15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어머니께 이별의 고통을 드리지 않으려고 그는 파리에 도착한 다음에야 알려 드렸고, 이듬해 1월 파리를 떠나면서 그는 어머니께 이렇게 썼다.

 

“제 마음이 지금처럼 평안한 때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저는 영벌로 빠져드는 영혼들을 구하고자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희생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 우리는 가장 확실한 길로 가는 것 아닙니까?”

 

1월 15일 파리를 떠난 베르뇌 신부는 6월 26일 마닐라에 도착했고, 이어 베트남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면서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겪어야 했다. 1843년 8월 23일 다시 마카오로 가서 전교지방에 배속되기를 기다렸고, 10월에는 베롤 주교가 지휘하는 만주교구에 배속되면서 평온과 기쁨을 되찾았다. 1844년 1월 24일 베르뇌 신부는 상해에 있었고, 이후 10년 동안 약 170만㎢나 되는 이 넓은 전교지방에서 일했고, 주교가 자리를 비운 동안(1844-1848) 부주교 자격으로 지극히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나갔다. 베르뇌 신부는 그곳 교회를 지혜롭게 관리했고, 1846년에는 신학교의 기틀을 다져놓기도 했다. 장티푸스와 콜레라로 고생하기도 했으나 용하게도 그는 살아남았다.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8월 5일자 교서로 베르뇌 신부를 카프사 명의주교 칭호를 가진 조선대목구 제3대 감목으로 임명해서 그 전해 1853년 2월 3일에 선종한 페레올 주교의 뒤를 잇게 했다. 그러나 우편물 배달이 늦어진 까닭에 현지에서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 새 주교가 조선으로 간다는 것은 위태로운 생활에 대한 각오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던 것일까? 한 편지에서 베르뇌 주교는 이렇게 썼다.

 

“조선. 더할나위 없는 순교자의 땅. 그 이름만 들어도 선교사들의 심금을 울리는 조선. 그 문이 우리 앞에 열려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기를 거절하겠습니까?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도 함께 한 조선 입국은 베르뇌 주교에게 위험한 모험이 따르기도 했다.

 

1856년 1월 4일 상해에서 중국배를 탄 베르뇌 주교 일행은 공기도 탁하고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화물창에 숨어서 3월 14일까지 지내야 했다. 한 작은 섬에 도착해서 그들은 상복을 가져오는 조선 교우들의 작은 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고나서 다시 바다로 나가서 이레 동안 항해한 후 마침내 밤을 타고 서울에서 몇 십리 떨어진 비밀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우리에게 이렇게도 다행스러운 여행을 허락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라고 베르뇌 주교는 편지에 썼다.

 

우선 주교는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베트남어를 배웠고, 중국어와 만주어를 배웠으며, 또 다른 말을 익히려고 애썼던 그는 이제 마흔이 넘어서 다시 또 하나의 그 어려운 외국어를 깨쳐야 했으니, 인간적으로 봤을 때 얼마나 우직하고 더디기만 한 결정이었던 것일까.

 

그러나 주교는 오히려 그런 어리석은 것 같은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보려고 했고, 산과 들을 다니면서 교우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으로 떠나기 앞서 베르뇌 주교는 자신의 보좌주교를 선택해서 성성(成聖)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교황청으로부터 받았던 것인데, 이 보좌주교는 단순한 보좌주교가 아니라, 오늘의 승계권 있는 ‘부교구장 주교’를 일컫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선택은 다블뤼 신부에게 떨어졌다. 그는 11년간의 활동과 조선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진정한 선교사로서의 사도적인 열성과 진실한 덕행으로 분명히 가장 자격 있는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1857년 3월 25일 성모영보축일(지금의 주님탄생예고 대축일) 밤, 서울의 주교댁에서 주교 성성식이 거행됐다. 다블뤼 주교의 편지를 읽어보자. “신중을 기하느라고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거행할 수가 없었던 이 의식에 메스트르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모였습니다. 의식은 주교댁에서 밤중에 서울의 회장들과 몇 명 안 되는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해졌습니다. 장소도 그렇고 비밀도 지켜야 했으므로 아주 화려하게 거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거의 카타콤바에서 하던 식이었습니다. 우리 신자 모두의 원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 마음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장엄한 우리 의식을 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 생전에 한 번 밖에 없을 이런 유의 의식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못내 슬퍼하고 있습니다.”

 

다블뤼 주교의 성성식, 즉 오늘의 주교 서품식이 거행된 다음날부터 같은 장소에서 성직자회의가 사흘 동안 개최됐다.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이 성직자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을 사목서한 ‘장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를 통해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에게 반포했다. 이때 선교사의 행동지침에 관해서 특히 두 가지가 결정됐는데, 하나는 선교사들이 부동산을 사들일 수 없다는 것, 또 하나는 의식주에 쓰고 남는 돈을 반드시 교구에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직자회의는 이 밖에 신학교 설립과 남자 학교 개설, 종교서적 인쇄를 위한 인쇄소 설치를 결정하고 세례받기를 원하는 지망자의 자격에 대한 새 규범을 세웠다.

 

장주교는 새로이 승품된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에게 “주교님,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시급한 일입니다.”라고 당부하는 한편으로 서울에 목판 인쇄소를 차려 나중에 순교 성인이 된 최형(崔炯) 베드로에게 운영을 맡기고, 그 후 인쇄소 한 군데를 더 설립해 1862년부터 《천주성교공과》와 《천주교 요리문답》등을 간행하기 시작했으며, 시약소(施藥所)를 세워 교우들과 일반인들에게까지 시료 혜택을 주었다. 또 성영회(聖?會) 사업을 통해 고아들을 기르며 돌보기도 했다.

 

부교구장 주교가 된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주교의 세례명은 안토니오이고,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다. 나중에 조선교구 제5대 감목이 되었던 다블뤼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과 라틴어를 조선어로 볼 수 있는 ‘나선소사전’(羅鮮小辭典)을 편찬하는 등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해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들 중의 하나이다. 조선 교회사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해 모두 1862년 파리(Paris)로 보냄으로써 후대의 귀중한 사료가 됐던 것인데, 이것을 기초로 샤를르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는 안주교는 1845년 10월 김대건 새 사제의 귀국길에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이미 12년 동안 양떼를 위해 봉사하고 있었으며, 주교 성성 당시 베르뇌 주교보다 네 살 아래인 만 39세였다.

 

한국 교회사에서 전국적인 4대 박해 가운데 마지막으로 자행된 병인박해는 대원군 이하응이 섭정을 하던 1866년(丙寅)부터 1873년(癸酉)까지 계속됐고, 1866년 봄에, 그리고 같은 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1868년과 1871년에 각각 일어났다. 이 박해로 당시 국내에서 활동 중이던 12명의 선교사들 중 9명이 순교했고, 남종삼 등 8천여 명의 교우들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병인박해 순교자들 중 스물네 분이 1968년 10월 복자로 선포된 다음 1984년 5월 6일 시성됐으며, 오반지 바오로를 비롯한 열일곱 분이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돼 시복시성 대상에 올라 있다. 스물네 분 성인들 가운데 열일곱 분이 한국인이고, 두 분 주교를 포함한 일곱 분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인데, 선교사들이 순교한 것은 박해 초기인 병인년 3월이었다.

 

3월 7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베르뇌 장 주교와 함께 칼을 받아 순교한 이들은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백신부(1838-1866), 도리 베드로 김신부(1839-1866), 볼리외 루도비코 서신부(1840-1866)였다. 키가 크고 아주 긴 이름을 가진 시몽 마리 앙투안 쥐스트(유스토)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백신부는 부제품을 받을 당시 동료들이 “유스토는 성덕에 대해 토론하거나 그 분석에 매달린 적이 없었고, 오직 성덕을 생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증언했다. 고통을 분석하지 않고 그대로 끌어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덕 역시 분석하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거룩한 여행에 필수불가결한 점이라는 사실을 150여년 전에 그는 이미 몸소 실행했던 것이다. 조선으로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유스토는 “주님께서 저에게 가장 좋은 몫을 주셨습니다. 제가 알기로 조선교회는 어떤 공동체보다도 아름다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숨을 거둘 때가지 그 나라의 선교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순교자들의 땅인 조선교회 만세!”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 가운데 유일한 귀족 출신인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자선사업가로도 이름이 알려진 노 판사 에드몽 드 브르트니에르 남작과 안느 몽테지 부인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아버지 에드몽 판사가 8년 동안 함께 일했던 수도원장 고트를레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이런 대목을 읽을 수 있다.

 

“모든 것에 앞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저는 제 자녀들이 참된 신앙인이 되도록 힘쓰고 있으며, 실로 이것은 자녀들에게 거는 오직 한 가지 저의 바람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선택해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부모형제와 고국을 떠나 산 넘고 물 건너 동양으로 온 선교사들! 파리에 있는 생 슐피스 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삭발례를 받은 다음해인 1861년 9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옮겨왔던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부제 때 동료인 피에르(베드로) 앙리 도리 부제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역시 피에르처럼 순교를 생각했더랬지. 내 아우 크리스티앙하고 이야기할 적에 교회를 위해 일생을 바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어. 그래서 작위를 이어받고 별장과 같은 유산을 물려받는 것도 아우의 몫으로 돌려놓았던 걸세.”

 

1865년 5월 27일 충청도 내포지방에 배가 닿아 입국한 드 브르트니에르 백신부는 조선에서 크게 아쉬운 것은 성체를 감실에 모실 수 없는 것이라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처럼 우리가 주님을 항상 믿음의 눈으로 뵐 수 있다면 크나큰 위로가 될 텐데…”라고 말한 적이 있다. 1866년 2월 26일 한양 남대문 밖 정의배 마르코 회장 댁에서 체포된 백 신부는 3월 6일 베르뇌 주교, 도리 김신부, 볼리외 서신부 등과 동시에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형장인 새남터로 끌려 나갔다.

 

“물, 물 좀 주십시오.”

 

군사들이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교우들 중 박 베드로가 물 한 바가지를 떠와서 형벌을 받는 사람에게 주라고 형 집행관에게 청해 허락을 받았으나, 군사가 분개해하면서 물을 땅에 쏟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금방 죽을 죄인들에게 마실 물은 줘서 무얼합니까?”

 

그러자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자기 머리 위에 늘어져 있는 막대기 끝을 움켜잡고 씹어보았다. 이렇게 해서 생긴 약간의 침을 한숨을 쉬며 삼켰더니, 이를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 한 사람이 외쳤다.

 

“너희 나라에서는 멀쩡하던 네가 남의 나라에 와서 이렇게 죽게 됐으니, 후회가 되지 않느냐?”

 

“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이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오.”

 

신부가 대답한 다음 “좋다”는 말을 세 번이나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팔방돌이를 하는 동안 신부의 허리띠가 끊어져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을 본 집행관이 군사에게 일러 바지를 추켜 매죄게 했다.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신부의 눈에 베르뇌 주교의 미소가 포개졌다.

 

새남터 형장에서 갈증으로 고통당하는 브르트니에르 백신부를 바라보는 베르뇌 주교는 이미 혼자서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일성록’(日省錄)에는 신문 때마다 주교에게 고문이 가해졌다고 적혀 있다. “고문이 열차례나 열한 차례에 가서 멈춰졌다”고 했는데, 이는 의자 다리만큼 굵은 세모 몽둥이로 열 번이나 열한 번 정강이를 힘껏 내리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교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 다만 매를 맞으실 때마다 긴 한숨만 내쉬셨지 뭡니까요!”

 

다시 옥으로 끌려가서는, 살이 떨어져 나간 주교의 다리를 포졸 가운데 한 사람이 기름종이로 처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베르뇌 주교가 이런 고초를 겪는 동안 2월 26일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체포됐고, 그 다음날에는 도리 김신부와 볼리외 서신부가 체포돼 세 선교사 모두 주교가 있는 옥에 갇혀 신문과 고문을 같이 당했다. 3월 7일자 ‘일성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금부에서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그 서양인 네 사람에 대해서는 과거 기해년(1839)의 선례에 따라 군 당국에 넘겨 참수하고 효수해서 무리들에게 교훈이 되게 하고자 하나이다.”

상감이 윤허했다.

 

주교와 세 선교사들은 죽음의 행진에 나섰다. 주교는 옥문을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조선에서 이렇게 죽으니 잘 됐다.”

 

성문 앞에 모여있는 군중을 보면서 주교는 여러 차례 한숨을 쉬었다.

 

“아, 저 사람들이 어찌 불쌍하지 않을손가!”

 

주님의 전갈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불쌍했고, 앞으로 닥쳐올 교구민들의 불행을 떠올리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신부님들, 우리의 여행은 이제 곧 끝나게 됐습니다. 우리 앞에는 천국문이 열려 있습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희망을 가지세요. 아시겠어요? 신부님들!”

 

한강변의 넓은 모래밭 새남터에 흰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깃대 가까이로 와서 사형수들은 땅바닥에 내려졌다. 집행관은 사형 선고문을 읽으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왜 죽어가야 했던가.

 

“너희는 조선에서 엄히 금하는 사교(邪敎)를 전파했다. 그런 연고로 조선 국왕께오서는 너희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신다.”

 

베르뇌 주교와 함께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을 받게 된 세 선교 사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고도 눈물겨운 사연이 있었지만, 루이 볼리외 신부는 특별히 부제 때 엄청난 고통을 바쳐드렸어야 했다.

 

“교구장 주교님께서 도무지 놓아주려고 하지 않으셨다며? 그만큼 우수해서 그랬을 테지?”

 

“1859년 11월 7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자 나는 대신학교로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더랬지. ‘하느님께서는 나를 붙잡아 매놓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을 끊으셨다’고.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아마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내 소명을 따르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여겼던 거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내가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서 선교사가 되는 허락을 받기까지는 4년을 더 기다려야 했으니까 말일세! 허허허!”

 

보르도 대교구의 대주교인 도네 추기경이 워낙 완강하게 말리는 바람에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지쳐서라도 포기하고 말았을 선교사의 꿈을 그는 꿋꿋하게 지키고 가꿔나갔던 것이다.

 

“이봐요, 루이 부제. 우리 교구에 보좌신부 자리 열입곱 군데가 비었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자네가 떠날 생각을 해서는 안돼!”

 

이처럼 번번이 거절하는 장상으로 해서 그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여러 통의 편지에서 읽을 수가 있다.

 

“주님, 제가 청하는 것은 쉽고 편안한 생활이 아닙니다. 지극히 어려운 생활입니다. 이는 또한 끝내 순교까지 하게 되리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어떻게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주위에서는 그의 마음고생을 눈치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으니, 그의 고해신부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루이 부제는 사도 바오로의 편지 한 구절을 가슴에 새기면서 복음적 친절을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길을 찾습니다”(1코린 10,33).

 

그런 삶을 통해서 루이는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희망을 가졌다. 대주교가 교구에서 일을 하면 장차 중요한 직책을 맡기겠다는 제안까지 했으나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전교지방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한국 천주교 해외선교사가 해마다 10%씩 증가해 2009년 3월 현재 81개국에 674명을 파견하고 있고, 한국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음을 자축하기 위해서 지난 3월 7일, 주교회의 선교단체 한국외방선교회(1975년 설립) 신축 본부 봉헌식이 거행됐다고 주교회의 홈페이지는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박해시대 ‘조선교회’는 곧 죽음이 약속된 선교 현장이었고, 이 죽음의 땅에 발을 딛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까지 애를 태운 외방의 선교사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장상인 교구장 추기경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인가, 내가 가고 싶은 선교사의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루이 볼리외 신학생은 은은하면서도 또렷한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오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 있는 데로 오너라.’

 

그는 ‘성령의 음성’이라고 여긴 그 소리에 희망을 둘 수 있었고, 낙망하지 않고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만일 하느님께서 제가 파리로 가는 것을 원하신다면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저를 데려가실 것입니다.”

 

교장 신부는 그에게 ‘선교사 지망자’의 자격을 주었다. 이 신학생은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말했다.

 

“제가 떠나는 데 주요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제가 자격이 없다는 것이고, 이러한 사실을 저는 압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주님 앞에서 저의 수련장이라고 여기는 신학교 생활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이 장애를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가 “신학교 생활을 거룩하게 한다”고 한 것은 양심적으로 공부하고, 전례적인 경건심과 성체 공경심을 발전시키며 선교사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지는 것 등이었다. 1861년 2월 어느 선교지에서 두 선교사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루이 신학생은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다.

 

“내가 그와 같은 죽음을 당할 자격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저 미신자 몇 사람의 구원을 위해 천천히 고생스럽게 다 타버리기를 청할 뿐이다.”

 

나이가 차지 않아서 사제직에 오를 수 없었던 볼리외는 교회법에서 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소신학교의 1862-1863학년도 교사로 임명 받았다.

 

사제직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업의 하나로 소신학교 교사가 된 루이 볼리외는 그해 3월에 폐충혈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느끼고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다만 신부가 되기 전에 죽는다는 것, 이 한 가지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오묘한 섭리로써 그의 건강을 되돌려주셨고, 1863년 8월, 도네 추기경의 허락이 떨어지게 해주셨다.

 

“파리로 가도 좋아!”

 

볼리외는 곧장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저는 기쁨으로 인해서 기운이 두 배나 빨리 회복되고 있는 느낌”이라고 썼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반대와 눈물로 해서 이내 슬픔으로 바뀌게 됐다.

 

“네가 떠나고 싶어하니 떠나려무나. 네가 우리 아들이 아니니 붙잡을 권리가 우리에겐 없으니깐 말야!”

 

이런 냉혹한 말에 떠나는 사람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1840년 10월 8일 태어난 그는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인 그해 5월 18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그때 열아홉 살이었던 어머니는 아기가 태어난 바로 그날 세례를 받게 하고, 다섯 살 때까지 동정 성모님의 빛깔, 즉 흰색 바탕에 파란 빛깔의 옷을 입히기로 약속했다. 보르도의 소신학교를 거쳐 1857년 대신학생이 되면서 선교사의 꿈을 간직했으나 그는 고생스럽게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께 속마음을 내놓지 못하고 있던 중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꿈을 펼치고자 했다. 그로부터 4년을 더 기다려서 외방전교회에 입회하도록 허락을 받은 그는, 어려움이 그치지 않았지만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1863년 8월 말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문을 들어선 그는 이듬해 5월 21일 “자만심 없는 신부가 되도록 지도해 주십시오”라고 주위에 청하면서 사제로 서품됐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배정을 기다리던 중 6월 15일 조선에 배정되자 이렇게 썼다.

 

“외교인 800만 명이 진리를 찾아 움직이고, 1만 8천 명의 천주교인이 60년째 박해와 싸우고 있는 반도. 선교사 여덟 명이 그들의 머리에 현상이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1년에 어른 900명에게 세례를 주는 전교지방 조선. 결코 돌아올 수 없고, 1년에 한 번 어둠을 틈타서나 들어갈 수 있는 유배의 땅 꼬레.”

 

볼리외 신부는 동양으로 떠나는 다른 아홉 선교사들과 함께 유언장을 작성했다.

 

“…신부요,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조선교구에 임명되어 이 나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기 전날, 나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는 여기에 나의 마지막 의향을 적는다. 만일 내가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죽으면, 나는 외방전교회 신학교나 또는 전교회의 어떤 전교지역 경리부에 보관돼 있을 수 있는 물품이나 현금으로나 개인 소유로 돼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조선교구에 주기를 원한다. 만일 내가 이 교구에서 죽는 행복을 가지게 되면, 그 교구의 봉사에서 내게 남을 수 있는 돈을 조선교구로 보내 주기를 원하며, 내가 어디든 다른 곳에서 죽는 경우에도 그와 같이 해주기를 원한다. 나는 이상과 같이 원하며 하느님과 동정녀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 앞에서 이를 밝히고 서명한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1864년 7월 11일에 작성하다. 그 증거로/조선교구에 임명된 교황 파견 선교사/베르나르 루이 볼리외.”

 

열 명 중 네 사람이 조선으로 배정받았는데, 나중에 백(白)씨 성을 갖게 된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민(閔)씨 성을 갖게 된 루카 위앵 신부, 앙리 도리 김(金)신부, 그리고 볼리외 서(徐)신부였다. 도리 신부가 갑자기 ‘꼬레 예찬론’을 펴기 시작했다.

 

“난 말일세, 나에게 이토록 아름다운 전교지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어.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는 땅, 내 꿈과 기도가 실현되는 땅이지. 복음을 위해 피 흘리기를 희망하는 곳 조선은 또한 내 거룩한 친구와 함께 살아갈 땅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전교지방인가 말일세.”

 

동료들이 ‘꼬마’ 또는 ‘뱅데(Vendee)의 작은 꽃’이라고 부르던 도리 신부는 뤼송교구 생틸레르드탈몽의 르포르 마을에서 1839년 9월 23일 태어났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날이 같은 해 9월 21일이고 보면, 바로 그 다음 다음날 태어난 이 아기가 자라서 26년 5개월 남짓 후 같은 장소에서 하느님을 위해 가장 소중한 목숨을 내어드린 것이다.

 

“신부는 되어라. 그렇지만 교구에 남아있지, 외방전교회는 생각하지도 말아라.”

 

신학생 시절 방학 때 어머니가 애원했다. “어머니, 외방전교회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계획을 세운 것이 8년이나 됩니다. 하느님께서 제 마음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했을 때 어머니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하고 같이 있으면서도 하느님을 섬길 수 있지 않니? 제발 어미를 버리지 말아다오.”

 

‘제발 어미를 버리지 말아다오.’ 어머니의 이 말에 도리는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원하시니 어머니 곁에 남아 있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교지방에 가는 것 물론 그만이지요. 그렇지만, 신부 되는 것 또한 그만입니다. 어서 바지와 작업복과 곡괭이를 주세요. 동생이 일하는 데로 가서 밭일을 할테니까요.”

 

도리의 이 말에 어머니의 반대는 끝이 났다. 그러나 눈물은 마르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저녁 내내 아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자 했다. 결국 그 고통을 당해내지 못했던지, 새벽 두시에 생띨레르 역까지 짐을 실어다주며 전송했다. 이렇게 해서 삐에르 도리가 소품자(小品者)로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 것이 1861년 8월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864년 5월 21일 사제직에 오른 그는 7월 19일, 프랑스 남부 마르세이유에서 배를 타고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위앵 신부와 함께 길고 위험한 항해를 시작했다. 코트다쥐르(Cote d'Azur). ‘감벽색(紺碧色) 해안’을 왼편으로 하고 지중해 너른 바다로 들어선 기선(汽船)은 구름처럼 연기를 뿜어 올리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먼 동양으로 가는 배다. 바람이 불고 바다는 짙푸른데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이 대서양이나 인도양과는 분명 다르다. 그냥 푸른 바다가 아니라, 어느만큼 검은 색조를 띄면서 짙게 푸른 감벽의 물결이 칸느와 니스, 이탈리아의 산레모에 이르는 연안에 출렁거리면서 멀리 알프스의 새하얀 눈빛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며? 루이 신부.”

 

“응. 5년 전 겨울,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유복자로 태어난 내가 마음 붙이기 어려웠지만, 친아들처럼 보살펴주신 숙모님 손을 뿌리치고 떠나올 적에는 눈물이 쏟아져서 혼이 났더랬지.”

 

볼리외 신부는 아주머니, 아저씨께 보낸 여행일기를 적었는데, 이는 두 부분으로 돼 있다. 1부는 선교사들이 파리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간 7월 15일에서 24일까지의 일기이고, 두 번째 부분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싱가포르까지의 일기로 마지막 날짜가 8월 19일로 적혀있다. 마르세이유를 떠난 7월 19일 일기를 보면,

 

“저희는 한 가지 감정, 한 가지 감격, 즉 가장 강력하고 가장 순수한 기쁨의 감정과 우리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고귀한 사제직에 저희를 선택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정이 어린 감격을 듬뿍 안고 프랑스를 떠났습니다.”

  

볼리외 신부와 동료 선교사들은 7월 15일 파리를 떠나 이듬해 1865년 5월 27일 조선에 도착했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뜨겁게 그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산골에 있는 교우촌 여기저기에 젊은 선교사들을 흩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볼리외 신부와 도리 신부는 바로 인접한 교우촌에 배치돼 정기적으로 찾아가서 서로 죄를 고백하고 듣기도 하면서 열심히 살자고 용기를 북돋아주고는 했다. 그들은 상복을 입고 다녔는데, 상복은 자신들의 얼굴을 가려주었고, 외교인과 포졸들에게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볼리외 신부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는 성인이 되고자하는 원의를 글로 적고 마음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흥분한다면 천주교인들을 모두 학살하고 말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계획을 마련하고 계신지, 이는 그분만이 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특히 내가 우리 처지를 감당할 능력이 있고, 필요한 경우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목숨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미친 듯이 사랑하는 큰 성인이 돼야 하고, 성인품에 오를 순교자가 돼야 합니다.”

 

조선에서 맞이한 두 번째 해가 병인년인 1866년이었고, 2월에 그는 서울에서 몇 십리 떨어진 경기도 광주 묘론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곳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말을 배우고 있던 그에게 주교는 첫 담당구역을 정해주었는데, 새 임지로 떠나려던 참에 “주교님이 붙잡히셨습니다”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묘론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답리의 이 요셉네 집으로 가서 피신하고 있다가 먼젓번 집주인 장제철의 밀고로 2월 27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튿날 볼리외 서신부는 용인 손골〔孫谷〕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도리 김신부와 함께 서울로 이송됐고,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한 끝에 사형선고를 받고 3월 7일 처형됐다. 베르뇌 주교 이하 드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의 차례로 참수됐으며, 함께 입국한 위앵 민신부는 또 다른 순교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그분은 순교에 대한 마음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크나큰 용기를 보였고, 눈을 감고 묵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날 새남터에서 마지막으로 칼을 받은 도리 신부에 대한 증언이다. 스물여덟 젊은 나이로 먼 이국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바친 이 선교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2008년 12월 29일 주님 공현 대축일 - 2009년 4월 29일 부활 제4주일 의정부주보, 최홍준 파비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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