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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성우 안토니오

2018.12.12 08:57

기도방지기 조회 수:115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성령님 당신의 풍요로움은 아무도 측랼할 수 없나이다 !

저희를 가르치시어 쓸데없는 상상과 생각들을 물리치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 김성우 안토니오를 본 받게 하소서 !

성 김성우 안토니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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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성우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경기도 광주 고을 구산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부유하였고 또한 정직하고 인심 좋기로 유명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3형제 중 맏이인 안토니우스는 성격이 온화하고 관대하여 외교인들도 그를 흠모하였다고 한다. 그 종손들이 고향에서 존경을 받으며 사는 것은 사람들이 그 증조부의 유덕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3형제 중 두 명이 즉시 입교하였고, 오래지 않아 셋째 뿐 아니라 여러 친척과 친구와 이웃이 그들과 뜻을 같이 하여 이 작은 마을이 열렬한 교우촌이 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별세한 뒤 안토니우스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에 오자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로 이사하여 느리골(현 효제동)이라는 동네에 집을 사서 있다가 동대문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현 마장동)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그는 자기 집에 강당까지 마련하여 회장으로서 모방 신부를 한여름 동안 모시기도 하였다.

   한편 구산에 살고 있던 두 형제는 박해가 일어나자 곧 잡혀 첫째 동생이었던 김만집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1841년 1월 28일(음력)에 옥사하였고, 둘째 동생 김문집 베드로는 사촌 김주집과 함께 광주 남한산성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안토니우스는 아내를 잃고 다시 열심한 교우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40년 1월경 배교자가 밀고를 하여 잡힐 위험에 이르자, 그는 지방으로 도망가 숨어 지냈지만 오랫동안 포위망을 피할 수 없어 결국 온 가족과 함께 붙잡혀 포도청을 거쳐 형조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는 포장 앞에 끌려와 거듭되는 심문을 받았고, 30대의 곤장을 맞았으나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을뿐더러 고문을 용감히 참아 나갔다. 안토니우스는 배교하라는 재판관의 독촉에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법정에 출두하여 곤장 60대를 맞았으나 그의 훌륭한 용기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밤에 당고개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때는 1841년 4월 29일이요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안토니우스의 유해는 고향 구산으로 옮겨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가족묘지 근처에 안장하였다. 1927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하여 유해의 골격을 맞춘 후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치하였다가 후에 절두산 순교성지의 성해실로 옮겨 모셨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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