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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뇌 장 시메온

2019.03.04 08:56

기도방지기 조회 수:277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흘렀다.

 

 

성령님 당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나이다 !

저희를 가르치시어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영원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베르뇌 장시메온을 본 받게 하소서 ! 

성 베르뇌 장시메온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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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주교의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그는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 뒤 루아르(Chaeau-du-Loir)에서 평범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장간 일을 하던 부친의 신앙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으나,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또 신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본당 신부가 학교에 보내어 공부하던 중, 1831년에 르망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1837년 5월 30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어 그는 신학교에서 교수생활과 지도신부의 역할을 담당하던 중 외국 선교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37년 7월 15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이어서 그는 두 명의 젊은 사제와 함께 1840년 6월 26일 필리핀의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1841년 1월 16일 ‘통킹’(Ton King, 현 북베트남)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1843년 3월 프랑스 함대 사령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8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 해 10월경에 그가 만주 주교로 물망에 오르게 되자, 그는 중국어 공부를 하면서 그 후 10여 년간 모든 열성을 다해 전교 임무를 완수하면서 현명하게 교구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1849년에 요동 지역에 박해가 일어나자 상해로 피신했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1854년 8월 5일 교황 비오 9세(Pius IX)는 그를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후임으로 제4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함과 동시에 조선 입국을 명령하였다. 이에 그는 두 신부와 함께 두 달 동안 숨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중, 다행히 조선의 교우 홍봉주의 안내로 상복을 입고 미투리를 신은 후 중국을 출발하여 4일 만에 서울에 당도하였다.

   그는 입국하자마자 상복을 입고 경기도 지방의 60여 개 공소를 돌아보았다. 1년 후인 1857년 한국 최조의 성직자 회의를 열어서 기도서의 개편과 직무를 분담하였으며, 11년 간 한국에서 선교하였던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의 부주교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직자 회의의 결과로 그는 1857년 8월에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 主敎 輪示 諸友書)라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면서, 그 당시 한국 교회가 내외적으로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한국 교회의 입장을 과시했다. 또한 배론에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당을 세웠으며, 교회서적이나 출판물을 저술, 정리하여 대량으로 출판하였다. 그래서 교세가 날로 확장되었고 교우 수도 증가하였다.

   1864년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물리치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러시아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이 사건이 해결되자, 대원군은 태도를 바꾸어 쇄국정책을 강행하면서 1866년 초에 병인년 대박해를 일으켜 그동안 활약했던 성직자들과 신자들 수천 명을 한꺼번에 학살하였다.

   1866년 2월 23일 다섯 명의 포졸들이 주교 댁을 급습하여 베르뇌 주교를 체포한 후 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같은 달 27일 대원군과 형조 재판관들은 베르뇌 주교를 끌어내어 갖은 신문을 다하면서 발목과 무릎을 조여 주리를 틀고, 나무걸상 형틀 뒤로 두 팔을 제쳐 매어 놓고서는 큰 곤장대로 매질을 가했다. 이즈음에 도리(Dorie, 金) 신부와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도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윽고 1866년 3월 6일 베르뇌 주교 일행은 참수형을 선고받고, 다음날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나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향하였다. 이때 장 주교는 “우리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이들 얼굴에는 희색이 넘쳐흘렀다. 사형장은 한강의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3천 명의 군졸들이 천막을 쳐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 둘씩 무릎을 꿇게 하고 양쪽 귀를 화살로 내리 꿴 다음, 이들 얼굴에 백회를 뿌림으로써 모든 처형 준비를 다 갖추었다.

   사형집행 선언문의 낭독이 끝나자 여섯 명의 희광이가 날뛰고 소리를 지르며 돌다가 베르뇌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베르뇌 주교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땅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이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체는 3일 후 교우들이 와서 그곳 부근인 왜고개에 정성껏 장례를 지내고 모셨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왜고개 성지

 

현재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장렬하게 순교한 후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떼 신세가 되었다. 그 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Manbant, 1803-1839년) · 샤스탕(Chastan, 1803-1839년) 신부와 앵베르(Imbert,1796-1839년)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었다.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바오로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도 모두 이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 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성당 옆에 새 단장한 왜고개 성지 입구. 순교자 현양비와 대형십자가, 십자가의 길, 기도처가 조성되었다.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들이 곤장을 맞고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형장으로 끌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참담한 모습이었다.

희광이들은 이들의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처형 장소에 이르러서는 머리채를 모두 기둥에 매고 나서 목을 쳤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사흘 동안 한강변 모래톱에 버려져 있던 이들의 유해는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타 몇몇 교우들에 의해 스무 날 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수습되었다. 세 성직자의 유해를 거둔 교우들은 시체를 큰 궤에 넣어 일단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암매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몰래 유해를 거둔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신 것이 불안해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삼성동)으로 세 성직자들의 시체를 옮겨 안장하고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 베드로에게 알려 주었다.

대형십자가와 성지 표지석.박순집 또한 부친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 볼리외 · 도리 · 프티니콜라 ·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의 시신을 찾아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다시 왜고개로 안장하였다.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 또한 찾아내어 이곳에 모셨다.

박해가 끝난 후 제7대 조선 교구장 블랑(Blanc, 1844-1890년) 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였고, 박순집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그리고 자기 집안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법정에서 증언하였다.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으로 총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순집의 도움으로 1899년 10월 30일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왜고개에 묻혀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잠시 모셨다가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하였다. 삼성산에 모셨던 세 성직자의 유해 또한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10월 21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모셨다. 1909년 5월 28일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과 최형의 유해가 발굴되어 역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복을 앞둔 1924년 명동 성당 지하묘지가 개봉되어 유해 일부가 로마와 파리 외방전교회 등으로 분배되었고, 1967년 절두산에 순교 기념성당이 건립되면서 명동 성당에 안장되었던 순교 복자들의 유해 대부분이 기념성당 지하 성해실로 옮겨졌다.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에는 총 27위의 성인 유해와 성명 미상의 순교자 유해 1위가 모셔져 있다. 103위 순교 성인 중에서 현재까지 유해가 전해지는 분은 27위뿐이다.

이렇듯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7위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2위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교회의 사적지이다. 또한 왜고개는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왜고개는 모두 10위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 중 8위가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식을 갖고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따라서 왜고개는 순교성인들이 쉬어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군종교구는 2013년 12월 15일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고 순례자들이 좀 더 편안하게 순례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성지를 확장하여 새로 단장하고 축복식을 가졌다. 새로 단장된 성지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대형 십자가상, 십자가의 길과 기도처 등이 마련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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