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타이틀1

슬라이드 타이틀2

슬라이드 타이틀3

||0||0여주성당 동정녀 공동체 회장 윤점혜(아가타)
동정녀 공동체 회장 윤점혜(아가타)

▣ 전통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목자가 없던 교회 창설기의 신자들은 교회 서적을 통해 신앙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한문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의 필요한 부분만을 취합하여 한글로 번역한 『성경직해광익』은 성서 본문과 주해·잠·의행지덕·당무지구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신약 4복음서의 주요 내용을 연중 주일과 축일에 맞추어 수록하고 해설을 붙인 것으로 당시의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사람의 정덕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동정(童貞)을 지키는 것이 상층이요, 홀아비나 과부가 되어 독신의 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다음이며, 배필의 정을 지키는 사람이 그 다음이다. 성현들께서는 동정을 금에 비교하고, 나머지를 각각 은과 구리에 비유하였다.

정결은 이처럼 신앙생활 안에서도 지고지순한 덕으로 여겨졌다. 살아서 정결을 지키는 것은 곧 육화론적(肉化論的) 영성을 함양하는 것이었고, 장차 순교의 용덕을 얻는 즉 종말론적(終末論 的) 영성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다.

윤점혜(아가타)는 순교할 때까지 정결을 지킨 최초의 신자 가운데 하나였다. 1776년경에 경기도에서 태어난 아가타는 훗날 양근의 한감개로 이주해 살았으며, 일찍이 동생 윤운혜(루치아)와 함께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최초의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1801년의 양근 순교자 윤유오(야고보) 형제는 바로 그녀의 사촌이다. 또 아가타의  부친 윤관주(일명 ‘윤선’ 안드레아)도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온 가족이 함께 가정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윤점혜(아가타)는 일찍이 동정생활을 결심했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교회 서적을 읽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 분명했으며 당시 조선 교우들 사이에 널리 읽혀진 동정 성인들의 전기도 그녀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는 처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가족과 친척들의 반대가 심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 언제고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박해시대의 교회사에서 마음먹은 대로 정결을 지키지 못한 예를 수 없이 볼 수 있다. 가족의 반대로 정결을 지키려는 결심을 버린 이야기, 납치를 당해 원하지 않던 남자와 혼인해야만 했던 애달픈 이야기, 총각 교우의 꼬임에 빠진 동정녀의 이야기도 있다. 윤점혜(아가타)는 이러한 어려움을 타고난 슬기로 잘 극복하였는데, 그가 동정의 결심을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처음으로 생각해 낸 꾀는 이러하였다.

어머니 이씨는 아가타의 나이가 차자 장차 혼숫감으로 쓰려고 얼마간의 옷감을 마련해 두고 있었는데, 아가타는 이 옷감으로 남장(男裝)을 지어 놓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머니조차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가타는 마침내 그 동안의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몰래 남장을 하고 집을 나가 사촌 오빠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입던 옷은 동물의 피를 묻혀 뒷산 나무에 걸어놓았다.  

▣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다
윤점혜(아가타)가 종적을 감추어 버린 날부터 가족들은 근심에 빠졌다. 게다가 뒷산에서 발견된 그녀의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으니, 그녀가 호환(虎患)을 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그러나 가족들의 걱정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 후 윤점혜(아가타)가 다시 가족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몹시 걱정할 것을 예상한 사촌 오라버니 윤유일(바오로)이 윤점혜(아가타)를 설득하여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이 일로 인해 가족과 친척들이 윤점혜(아가타)를 크게 꾸짖었지만, 정결을 지키겠다는 그녀의 생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행히 어머니 이씨만은 이러한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고 갖은 질책으로부터 그녀를 보듬어 주었다.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윤점혜(아가타)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머리에 쪽을 찌고, 혼인한 적이 있는 과부처럼 행세하면서 동정을 지켜나갔다. 그로부터 2년 뒤, 윤점혜(아가타)는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까지 받는 은총을 누렸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사망하자, 윤점혜(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그녀는 언제나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켰으며, 극기 생활과 성서 읽기에 열중하여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고, 아가타 성녀와 같이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였다. 당시 윤점혜(아가타)가 열심히 연도를 바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는데, 이 내용은 <1811년 조선 교우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수 록되어 있다.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아가타의 마음에 늘 걸리는 것이 있었답니다. 어머니가 임종시에 성사를 받지 못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아가타는 어머니가 성모님 곁에서 시중을 드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나중에 주 신부님에게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 드렸더니, 신부님께서는 ‘그 꿈이 사실이라면 열심히 연도를 바치는 것이 좋겠다’ 고 말씀하셨고, 이에 따라 아가타는 열심히 연도를 바쳤습니다. 또 윤점혜(아가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묵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묵상 체험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어느 날 아가타가 묵상을 하고 있는데, 성모님의 가슴 위로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가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믿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여쭈어보았더니, 신부님께서는 ‘이는 실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나에게도 그런 모양의 상본이 있는데 한 번 보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아가타가 그 상본을 보니, 정말로 자신이 묵상 중에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습니다.

이후로 윤점혜(아가타)는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그분의 고통에 동참해야 하겠다는 순교 원의 또한 더욱 굳어져가게 된다.

▣ 순교와 기적
그 무렵 윤점혜(아가타)의 동생 윤운혜(루치아)는 여주 출신의 열심한 교우 정광수(바르나바)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비신자였던 시부모 때문에 온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윤운혜(루치아)는 남편과 상의한 뒤, 한양의 벽동에 집을 구해 함께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윤점혜(아가타)는 동생 부부가 한양으로 올라오자 자주 그 집을 왕래하면서 교회 일을 도울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실제로 윤운혜(루치아)와 정광수(바르나바) 부부는 자기 집 마당 한켠에 따로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곳을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묵주를 제작하였고, 교회 서적들을 베껴서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주었다. 이들 부부의 집은 한국 최초의 성물 보급소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채 2년이 가지 못하였다. 1801년 초 신유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윤점혜(아가타)는 함께 생활하던 강 골롬바 회장 등과 함께 체포되었고, 동생 윤운혜(루치아)도 그 뒤를 따랐다. 윤운혜(루치아)는 이후 신앙을 굳게 증거하고 4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한편 루치아의 남편 정광수(바르나바)는 박해 초기에 한양을 떠나 지방으로 피신할 기회를 얻었으나 후에 포졸들에게 자수하였으며, 갖은 형벌을 극복한 뒤 12월 26일 고향 여주에서 순교하였다.  

윤점혜(아가타)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밀고와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동시에 그녀의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토록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다. 형조에서 있은 최후 진술에서 아가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0년 동안이나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마음으로 그 진리의 가르침을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결코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형조의 판결에 따라 윤점혜(아가타)는 곧 양근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당시 그 감옥에는 여자 교우 한 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훗날 감옥에서 나오게 된 그녀는 주변 교우들에게 이렇게 증언해 주었다고 한다. “아가타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나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아주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습니다.”

윤점혜(아가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양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칼날 아래 피를 흘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였다. 그때 이 순교의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기이한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휘광이의 칼날이 아가타의 목을 베자, 그 자리에서는 우유 빛이 나는 흰색의 피가 흘렀습니다.”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이보다 정확하게 이틀 전 윤점혜(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어 형벌을 받고 한양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동정녀 문영인(비비안나)의 목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었다.

아! 보배로운 피. 천상의 영예로운 보관(寶冠)이 동정 순교자의 머리에 씌워지는 순간이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3 <font size=3>세 번째 편지 기도방지기 2011.10.23 1108
192 <font size=3>두 번째 편지 기도방지기 2011.10.22 1126
191 <font size=3>첫 번째 편지 기도방지기 2011.10.15 1218
190 <font size=3>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기도방지기 2011.10.03 1366
189 <font size=3>최양업신부 약전 기도방지기 2011.10.03 1300
188 <font size=3>최양업 신부 시복시성기도문 기도방지기 2011.10.03 1804
187 <font size=3>124위 순교자를 모시게 되어 감사합니다 기도방지기 2011.09.13 1364
186 <font size=3>124. 이순이 루갈다 (1782~1802년) [1] 기도방지기 2011.09.13 2195
185 <font size=3>성체께 대한 사랑이 강하였던 이순이루갈다 [1] 기도방지기 2011.09.13 1453
184 <font size=3>이순이 (루갈다) [1] 기도방지기 2011.09.13 1336
183 <font size=3>123. 유중철 요한 (1779~1801년) [1] 기도방지기 2011.09.13 1193
182 <font size=3>※ 유중철 (요한) [1] 기도방지기 2011.09.13 1181
181 <font size=3>122.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 [1] 기도방지기 2011.09.13 1170
180 <font size=3>┗ 치명자산 성지 홈페이지 자료 [1] 기도방지기 2011.09.13 1280
179 <font size=3>121. 윤점혜 아가타 ( ? ~1801년) [1] 기도방지기 2011.09.12 1208
178 <font size=3>┗ 송종례 수녀님의 글|♡ 한국시복 124위 [1] 기도방지기 2011.09.12 1146
» <font size=3>여주성당 동정녀 공동체 회장 윤점혜(아가타) [1] 기도방지기 2011.09.12 1164
176 <font size=3>120. 윤유오 야고보 ( ? ~1801년) [1] 기도방지기 2011.09.12 1058
175 <font size=3>┗ 윤유오 유한숙 |♡ 한국시복 124위 [1] 기도방지기 2011.09.12 1152
174 <font size=3>119. 윤운혜 루치아 ( ? ~1801년) [1] 기도방지기 2011.09.12 1222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