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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손소벽 막달레나

2018.09.17 11:00

기도방지기 조회 수: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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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손소벽 막달레나, 그녀는 일곱 번이나 문초당하는 동안 주뢰를 세 번 틀리고

태장 260도를 맞아 살이 헤어져 떨어지고 상처에서는 피가 줄기차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늘 이렇게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만일 천주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내 힘만 가지고는 다만 일각이라도

벼룩이나 이가 나를 뜯어먹는 것만이라도 참아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주께서는 참아 받을 힘을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 얼굴도 이름도 아니 가지신분 !  

저희를 가르치시어 올바로 기도하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소벽 막달레나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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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녀 손 소벽 막달레나는 서울에 살던 신자 가정에서 1802년(純祖2)경에 태어났다

 1802년(純祖2)경에 태어났다. 그러나 부친이 천주교 신앙으로 인하여 유배를 당하고 모친마저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그녀는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성장하면서 그녀는 성격이 온순하고 몸가짐이 조심스러웠으며, 바느질과 수를 놓는 솜씨도 곱기로 유명하였다고한다. 다만 어려운 

집안 사정을 겪었으므로 감히 교우들과 상종하지를 못하였으며 또한 오랫동안 신자가 없는 

지방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늦게서야 진실된 성교의 진리를 알게 되었다. 

 

천주교에 입교하자 마자 막달레나는 곧 열성적으로 이를 신봉하기시작하였으며, 17세가 되어서는 유명한 교우 최창흡(崔昌洽) 베드로와 결혼을 하여 순교일가(殉敎一家)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훗날 그녀의 가족들중 성인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그들 부부와 딸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 그리고 그들에 앞서 순교한 사위 조신철(趙信喆) 까롤로 등이다. 

 

결혼한 후 모범적으로 생활하던 막달레나 부부는 자녀 11명을 낳았으나 대부분 어려서 사망하고 맏딸 바르바라와 두 살짜리 막내 딸만이 있었다. 특히 바르바라는 부모의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본받아 어려서부터 신앙에 대한 열의로 가득차게 되었다. 막달레나의 가족들은 콜레라가 한창 유행하던 1821년(純祖21)경에 세례를 받았으며,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함에 이르러서는 그들로부터 성사도 받을수 있었다. 이후 그녀의 가족들은 서로 

권면하면서 순교에 대한 열망을 굳혀 나갔다. 

 

1839년의 기해교난(己亥敎難)으로 교우들에 대한 박해가 점점심하게 되자, 막달레나는 포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친척들과 함께 숨어서 지냈으나 결국 남편과 막내딸과 함께 체포당하는 몸이 되었다. 

포장(捕將)앞으로 끌려간 그녀는 7회에 걸쳐 심한 고문을 받아야만 하였다. 

 

특히 사위인 까롤로가 중국으로부터 가지고온 물건이 그녀의 집에서 압수되었기 때문에 포장은 그 가족들에게 보다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러한 다음 포장은그녀에게 『너는 누구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느냐? 언제부터 그것을 신봉하게되었느냐? 너의 집에 내왕하는 동료들은 몇이나 되느냐? 너의 집에서 나온 물건은 무엇에 쓰는 것이며, 그 주인은 누구냐? 이 말에 대답을 하고 천주를 배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그녀는 『할머니로부터 천주교를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이를 봉행하였읍니다. 말씀하시는 물건은 누가 들여온 것인지 자세히 알 수가 없으며 동료들을 밀고하면 그들이 해를 입을 터이니 말할 수가 없고, 더우기 천주를 배반한다는 일은 저로서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명백히 대답하였다. 포장은 화가나서 형벌을 가하도록 한 후, 『한마디로 배교한다고만 하면 석방되어 네 어린 딸과 남편과 함께 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유혹과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굴함이 없이 『제 목숨은 제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읍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막달레나는 고문을 당하는 동안 여러차례 주뢰형(周牢刑)을 받고 곤장(棍杖)도 2백 60대나 맞아 살이 헤어져 떨어지고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만일 천주께서 나를 도와 주시지 않는다면 내 힘으로는 벼룩이나 이가 주는 괴로움조차 잠시라도 견딜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련을 참아내는 힘은 오직 천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라고 자주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 딸이 옥중의 고통 속에서 시달리고 먹을 것이 없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는 모정에 이끌려 신앙의 용기가 꺾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읍내에 있는 일가 친척에게 딸을 맡겨 내보냈다고 한다. 

 

오랫동안 포청(捕廳)의 옥에서 고통을 겪던 막달레나는 남편과 함께 형조(刑曹)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그녀는 변함없는 용기를 나타냄으로써 그날로 사형의 결안(結案)을 받았다. 

 

그리하여 남편이 순교한지 1개월 정도가 지난 1840년 1월 31일(陰, 1839년 12월 27일)에 당고개(堂峴)에서 

참수(斬首)를 당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12월 2일, 김옥희 수녀(한국 순교복자회ㆍ오륜대 순교자 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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