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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고순이 바르바라

2018.05.20 09:42

기도방지기 조회 수:188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나는 천주를 위하여 치명함으로써 그 분께 감사하련다

 

 

성령님  온세상의 미래를 아시는분 !

저희를 도우시어 육신과 악마의 지배를  부리치게 하소서 !

주님 !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고순이 바르바라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고순이 바르바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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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이전에도 12월 29일은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날이었다. 즉 오래전 이날 캔터베리 대주교가 순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형리들을 향하여『나는 천주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죽음을 당하겠노라』고 하며 죽음에 대한 강한 용기를 보여 주었었다. 이제 장소와 시간은 변하였지만 같은 성인의 자리에 오른 조선 교우들도 그에 못지않은 용기를 나타내게 되었다. 주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은 위대하며 고결하였다. 어떠한 지위와 나라에 있어서도 이러한 사랑을 선언하고 지지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교우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천주교회의 명예요 힘인 것이다. 

 

성녀 고순이 바르바라는 1801년의 신유교난(辛酉敎乳)때에 순교한 고광성(高光晟)의 딸로 1798년(正祖22)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본래 황해도 평산(平山)고을의 양민이었으나, 아마도 순교하기 이전에 이미 서울로 이사하여 생활한 듯하다. 바르바라는 어려서부터 지조가 굳고 지력이 출중하였으며 부친의 신앙심을 본받아 수덕생활에도 열심이었다. 

 

나이가 18세에 이르러 바르바라는 열성적인 교우 박종원(朴宗源)아우구스띠노는 신자들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본분을 다하다가 1840년 1월 31일에 순교한 사람이었다. 덕과 재주를 겸비한 이 두 교우의 만남은 신앙 속에서 새로운 결실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같은 신앙심으로 생활을 하였으며, 체포된 후에는 강요와 형벌을 함께 당하는 행복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천상의 영광된 자리에 올라 영원한 삶을 함께 하였던 것이다. 

 

결혼한 후 바르바라는 자녀 셋을 낳아 이 가정을 자녀들의 교육과 신심의 요람이 되는 모범가정으로 만들었다. 남편의 자선사업을 아무런 불평 없이 도와주며 힘써 냉담자(冷淡者)들을 권면하고, 무식한 이들에게는 교리를 자세히 가르쳐주며, 병자가 있으면 전심으로 그를 간호하였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후에는 성사를 받음으로써 은총을 얻고 더욱 분발하여 신앙 활동을 하였다. 박해가 시작되자 바르바라는 부친의 영광스러운 순교를 다시한번 생각하면서 자신의 피를 흘려 주님께 대한 사랑을 증명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중 남편 아우구스띠노가 체포되자 그녀는 남편과 괴로움을 함께 할 생각으로 포청에 자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이미 그녀가 남편과 같은 열성적인 신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에 이튿날인 10월 27일에는 그녀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체포 당시 그녀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이러한 은혜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나는 천주를 위하여 치명함으로써 그 분께 감사하련다』라고 하는 굳은 신앙심을 나타냈다. 

 

이들 열성적인 부부는 이제 포청의 옥에서 다시 만나 그 은혜를 천주께 감사하고 자신들의 처지를 서로 축복하며、새로운 고통의 길로 꿋꿋하게 걸어 나가자고 서로를 격려하였다. 

 

포장(捕長)은 그들 부부를 함께 불러내어 똑같은 질문을 하고는 배교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들 부부가 이를 단연코 거절하자 포장은 같은 형벌을 그들에게 내렸다. 바르바라는 여섯 차례나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받은 평온한 마음과 굳센 정신으로 이를 극복하여 신심(信心)이 흔들린 적은 잠시도 없었다고 한다. 

 

열흘 후에 바르바라 부부는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었다. 그 곳에서는 또 다른 형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남편과 함께 여전히 힘든 고문을 참아내면서 주님을 찬양할 뿐 굴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형조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형선고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 그녀는 사형 집행일을 손꼽아가며 기다렸다. 그리고 정하여진 날이 가까워 오자 함께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전에는 순교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무서워서 떨었었는데, 성신께서 나 같은 죄인도 은총으로 감싸주시니 지금은 아무 두려움이 없이 도리어 기쁘기만 합니다. 나는 죽는 것이 이다지도 쉬운 일인 줄을 몰랐습니다』라고 말하여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순교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기다리던 12월 29일, 바르바라는 서소문(西小門)밖의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斬首)를 당하여 순교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2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9월 30일, 김옥희 수녀(한국 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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