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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홍병주 베드로

2018.09.04 09:07

기도방지기 조회 수:220

 

두 형제는 치명자의 후손답게 문초에 따르는 

가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굴복하지 않았고, 

교우를 고발하는 일이나 비겁한 말을 하는 일도 없었다. 

 

성령님 충만한 신비의 비둘기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홍병주 베드로를 본받게  하소서 !

성 홍병주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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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양반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난 홍병주는 1801년 신유박해로 조부 홍낙민(洪樂敏)이 순교하자 아버지 홍빈영을 따라 충청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瑞山) 고을 여사울로 이사, 그곳에서 자랐고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동생 홍영주(洪永周)와 함께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의 회장이 되었다.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는 형제지간으로 주님께 대한 견고한 신앙과 가르침은 부친이 자녀에게 넘겨준 유일한 유산이었고, 한편 그들은 가정의 전통을 이어받아 열심 수계하여 남달리 뛰어난 그들 덕행은 모든 이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이 나라에 들어온 전교 신부들은 두 형제를 그 지방 회장으로 임명해 교우들을 돌보고 지도하게 하였다. 이에 그들은 더욱 열심히 분발하여 가족과 모든 교우들을 정성껏 권면해,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찾아 돌보고 위로하였다. 그들의 열성과 교우들에 대한 회장으로서의 책임 수행은 모든 이의 존경을 받게 하였고, 전교 신부들도 그들의 재능과 헌신에 감격하였다.

 

기해년에 박해가 크게 일어나 극히 위험할 때, 형제는 한 선교사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이 같은 무모한 행위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을 확신한 그들은 결국 1839년 9월 말, 서울 포졸에게 잡혀 포도청에 압송되었다. 유다스 김여상이 기어코 잡아야 할 유력한 교우명단에 그들 이름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포장은 형제를 불러 문초하길 “배교하라. 그리고 책과 동교인을 대라”고 하였다. 그러나 두 형제는 치명자의 후손답게 문초에 따르는 가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굴복하지 않았고, 교우를 고발하는 일이나 비겁한 말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들은 곧 형조로 끌려갔다. 이 때 병조판서는 홍병주 형제의 친척이었다고 하는데, 한 증인의 말에 의하면 홍석주였다고 한다. 그래서 판서는 자신이 직접 고문을 가하기가 싫어 보조관으로 하여금 기어코 배교하도록 해 사형에 처하지 않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형제가 얼마나 많은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던가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같은 감옥에 갇혀 있는 그들을 배교시켜 판서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잔인한 고문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그것으로 형제의 신앙을 더욱 빛나게 하였을 뿐이니, 사실 형조에서는 이 형제의 문초에 대해 이렇게 절망적으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홍병주는 홍낙민이 조부가 되고 재영이 숙부가 되므로 그들에게서 도를 배운 만큼 미혹됨이 더욱 심하다.”

 

“홍영주는 요서와 요술을 가정의 학문이라고 자칭, 주재의 초상을 거짓으로 지어냈으며, 형벌을 감심하고 죽기를 맹세하여 뉘우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결국 홍병주는 42세가 되던 1840년 1월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堂峴]에서 참수형을 받아 동생인 홍영주보다 하루 먼저 순교했다. 이어서 형 병주 베드로가 처형된 다음 날인 1840년 2월 1일 영주 바오로도 당고개에서 참수치명하니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소공동체 모임 길잡이 작은공동체, 201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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