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타이틀1

슬라이드 타이틀2

슬라이드 타이틀3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

2018.04.23 09:31

기도방지기 조회 수:144

막달레나는 이 권고에 따라 신자의 본분을 충실히 지키며 살았다

 

성령님 영혼안에서 기적을 행하시는분  !

저희를 이끄시어 깨어있는가운데 완덕의 길을 가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를 본받게 하소서 !

성녀 한영이 막달레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9.52.jpg

聖女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는 일찍부터 성교의 진리를 안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천주의 섭리는 그녀에게 신앙의 길을 안내하였으니, 이는 결혼을 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을 때에 그녀는 당시 나라 안에서 유명한 학자였던 권진사(權進士)에게로 출가를 하였다. 남편 권진사는 중년에 이르러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입교한 후 아내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으며 병으로 죽음에 이르러서는 아내에게 천주교를 열심히 봉행하도록 이른 다음 임종대세(臨終代洗)를 받았다. 

 

과부가 된 막달레나는 어떤 열심한 교우의 집에서 살았는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매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훗날 순교하여 성인의 자리에 오른 그녀의 딸 권진이(權珍伊)아가타는 나이가 어렸을 때 일찍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예절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너무나 가난하여 그녀를 집에 데려갈 수 없었으므로 그 동안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丁夏祥)바오로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어머니 막달레나로부터 교훈을 배워 왔던 아가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든 장점을 갖추었으며, 마음속으로는 수정(守貞)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방제(劉方濟)신부가 입국하자 신부에게 자신의 결혼을 파기(破棄)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신부로부터 이 파기의 허락을 받은 그녀는 그 후 신부의 집에 있으면서 교회의 일을 돌보는데 열심이었다. 그러나 유방제 신부는 이 어린 소녀를 범하여 당시 조선교회를 비탄에 잠기게 추문(醜聞)의 주범이 되었다. 후에 입국한 모방(Mau-bant)신부는 이 사실을 알고 유 신부를 중국으로 축출한 후, 아가타를 열심으로 권면하여 다시 신앙의 본분을 지키도록 하였다. 

 

딸이 다시 본분을 행하고 열심으로 교리를 실천하는 것을 본 막달레나는 딸과 함께 생활하면서 깊은 신앙심으로 딸을 도와주었다. 

 

이외 아가타는 자신의 행동으로 일으켰던 추문을 보속하려고 노력하며、참회와 함께 순교의 길을 진실로 원하기에 이르렀다. 막달레나가 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중 이경이(李璟伊) 아가타라는 교우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 집으로 왔다. 이경이 아가타는 지방의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어떤 내시(內侍)에게로 시집을 갔었지만,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앵베르(Imbert)주교에 의하여 그 결혼이 무효화되었던 것이다. 

 

세 여인은 서로 격려해 가면서 신심과 속죄의 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을 알고 있던 배교자가 밀고를 하여 포졸들이 곧 막달레나의 집으로 몰아닥치게 되었다. 기해년 7월 17일 밤에 세 여인은 모두 체포되었으며, 그들과 함께 있던 교우의 여종 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체포되었다. 

 

관원들은 이들을 체포하자 이름을 적은 후 막달레나만을 옥에 가두게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세 젊은 여인들은 이웃집에 감금하여 두고 옥졸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다. 관원들의 이러한 행위는 오래지 아니하여 그 사실이 드러났다. 

 

그 동안 교우들을 밀고하여 왔던 배교자 김여상(즉, 金順性)은 젊은 여인들이 감금되어 있는 집으로 와서 위협과 유혹으로 권진이 아가타를 회유하여 함께 도망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아가타는 멸시하는 말로만 이에 대꾸할 뿐이었다. 

 

이때 포졸들이 아가타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마음이 움직여 그녀를 탈출시키기로 동의하였고, 이리하여 며칠 후 아가타는 여종과 함께 도망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경위를 알고는 곧 탈출을 눈감아준 관원과 옥졸들을 귀양 보냈다 한다. 아가타는 그 후 포졸들의 수색에 의하여 다시 체포되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포장은 막달레나와 두 아가타에게 무서운 형벌을 가하였다. 막달레나는 어린 여인들을 위로하며 불굴의 인내로 형벌을 참아내었다.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그녀는 새로운 고문과 형벌을 당하였으나 포청에서와 마찬가지로 순교에 대한 의지만을 나타내었다. 결국 형조에서는 그녀의 신앙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는 사형의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서소문밖의 형장으로 나가면서도 막달레나는 안온하고 화평한 마음으로 순교에 대한 영광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그녀가 참수(斬首)를 당하니, 그때는 1839년 12월 29일이요,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9월 9일, 김옥희 수녀(오륜대순교자 기념관장)]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