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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2018.05.14 15:26

기도방지기 조회 수:289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여 주세요 

 

 

 

성령님 저희의 미래 또한 아시는분 !

저희 가족과  친구들과  은인들과  모든이를 당신보호에 맡기나이다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을  본받게 하소서 !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 저희를 위하여 빌러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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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순교일가(殉敎一家인 정씨(丁氏) 집안 중에서 마지막으로 성인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정정혜 엘리사벳이다. 그녀의 집안이 학문으로 유명하였으며, 조선 교회의 창설과 수난기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번 이야기한바 있다. 1801년의 신유교난(辛酉敎難)때에 순교한 그녀의 부친 정약종(丁若鍾)과 그 형제들이나 그녀의 큰오빠인 정철상(丁哲祥)까롤로 그리고 최초의 신학생으로 기해교난 때에 순교하여 성인의 자리에 오른 오빠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그녀의 모친 유소사(柳召史) 체칠리아 등이 모두 조선 천주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교자들이었다. 

 

집안 전체가 그러하였기 때문에 엘리사벳은 일찍부터 성교회의 진리를 몸에 익히게 되었다. 열살도 넘기전에 집안이 당하는 박해속에서 그녀도 옥에 갇혔다가 모친과 함께 풀려난 적도 있었다. 이후 그녀가 겪은 역경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련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나갈줄 알았으며 가난과 추위와 굶주림도 이겨나갈 수 있었다. 언제나 전심전력을 다하여 생활했던 그녀는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장차 교우들을 위하여 북경을 왕래하며 선교사들의 일군이 될 오빠 바오로의 뒷바라지도 하였다. 처음에는 천주교로 인하여 집안이 망하였다고 생각하던 친척들도 그녀의 아름다운 모범과 훌륭한 덕에 이끌려 적대감(敵對感)을 버리고 입교하기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천주님께 동정(童貞)바치기를 원하였던 엘리사벳은 어디에서나 단정한 태도로 취하였으며 아무리 가까운 친척의 남자라 할지라도 똑바로 쳐다보는 일이 없었다. 

 

30세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약해져서 5년 이상이나 강한 유혹을 받았지만 그녀는 기도와 대재(大齋), 편태(鞭笞)등을 그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는 눈물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 엘리사벳은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기를 전심으로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앵베르(Imbert)주교와 모방(Maubant)、샤스땅(Chastan) 신부 등이 입국한 후에는 그분들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정성으로 보살펴 드림으로써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또한 교우들이 자주 그녀의 집에 모이게 되자 그들을 가르치고 권고하여 성사를 받도록 준비시켰다.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애긍시사(哀矜施捨)에도 항상 열심이었다. 주교와 신부의 일을 보살펴 드리는 모친과 오빠를 따라 다니면서 헌신적으로 일을 하며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시어 성사를 쉽게 받도록 해주신 천주께 항상 감사를 드렸다. 

 

이러한 그녀들은 앵베르 주교는 항상『엘리사벳은 참으로 여회장의 일을 볼만하다』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같은 열성과 신심(信心)을 가졌음에도 엘리사벳은 박해가 일어났을때 순교가 자기의 힘에 겨운 일이라 생각하고는 일시 겁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교우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한편 자신도 전보다 더욱 열심으로 순교할 준비를 하였다. 주교가 서울을 떠나 시골로 피신하여 갔을때 엘리사벳은 모친과 오빠를 도와 교우들을 위로하며, 옥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의복과 음식을 장만하여 주었다. 

 

포졸들은 이렇게 열성적인 엘리사벳의 집안을 쉽게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모친과 오빠와 함께 7월11일에 체포되어 관청으로 압송당하였다. 관헌은 배교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유혹하였으나 굳은 그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관헌들은 그녀의 신앙이 굳고、또한 동정을 지킨데 대하여 더욱 화를 내고 형벌을 가하였다. 계속적으로 7회의 신문과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으며 곤장(棍杖)도 3백20대나 맞게 되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잠시도 평온을 잃지 않았으며『천주와 성모 마리아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오늘날까지 무사히 살아 왔으니 적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괴로움을 이겨냄으로써 그분들에게 감사해야 하겠디』고 말하였다. 

 

관원은 이제 엘리사벳을 배교시키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10월 2일에 형조(刑曺)로 이송하였다. 형조의 옥에 갇힌 후 그녀는 갇힌 이들을 보살피는 것으로 나날을 보냈고、그들과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마음이 얼마나 굳세었던지 그녀는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떠나면서도 교우들에게『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여 주세요』라는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마침내 엘리사벳은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斬首)되어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는 43세로 동정녀였다.

 

[가톨릭신문, 1984년 9월 23일, 김옥희 수녀(한국 순교복자회ㆍ오륜대순교자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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