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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맺는 말

   하느님의  지혜로 가는 길에  있는  여행자들은  
   더  멀리 갈수록  길이  더  열리고,
   무한하게 뻗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 오리겐

나는 성인들에 관한 책을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중세의 전설들, 영적 비망록, 순교전, 그리고 헌신에 관한 안내서 등등.
그러나 그런 노력이 행복하기 위한 충분조건이라면 토마스 머튼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요람에서 지금까지 볼 때에 매우 행복한 사람, 영적인 백만장자가 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행복이나 거룩함이란 우리가 무엇을 읽는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실천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매일은 새로운 실패들을 가져다 준다.
나는 참을성이 줄어든다.
나는 작은 것들에 대해 걱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온갖 혼란스러움에 휘말리고 은총의 징표에는 무감각하다.

영웅적인 행동을 꿈꾸지만 애덕을 행할 수많은 기회들을 게을리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사람처럼 나는 행복을 염원한다.
이러한 욕구는 인간존재의 특징이고, 우리가 보다 풍요로운 삶에 초대받고 있다는 징표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이곳 저곳에서 행복을 찾고 어떤 야망을 성취하거나
어렴풋한 위기를 해결하면 행복이 따를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내가 공부했고 알고 있는 성인들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행복이 지나가는 느낌이나 바깥의 조건, 상황에 있지 않다고 믿었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참다운 행복이 우리가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의 이면이라고 알려준다.

거룩함과 행복은 똑 같은 실천으로 얻어지며 똑같은 목표에 모인다.

만일 거룩함이 어떤 천성이나 도덕적인 완성을 의미한다면 이런 목표는 오로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러나 거룩함이란 “올바른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어떤 규정이나 처방전 같은 것도 아니다.

거룩함이란 존재하는 습관, 삶의 어떤 충만함, 혹은 “사랑스러운 영”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목표와 근거를 충만하게 채워주는 어떤 품성, 기질의 이름이다.
그렇지만 이런 품성, 기질은 그냥 우연하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앞서 묘사했던 의미의 거룩함이라면, 그것은 상당한 일과 실천에서 오는 결실이다.

거룩함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에게 마감이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그리고 오로지 그 길에 있을 따름이다.
그런 까닭에 마치 성인들을 어떤 다른 피조물을 대표하는 것인 양 말하지 말고,
“거룩함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면 즉시 우리는 성인들, 우리의 동료여행자들과 일치되는 것을 느낄 것이며
그런 느낌은 성인들과 우리를 갈라놓는 느낌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길 원하는 만큼 “진행중”인 성인들이다.
확실히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그의 청중들을 성인들이라고 부르면서 아무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성인들인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없다.

다만 행복의 길, 쾌활함과 균형의 길, 우리로 하여금 경험을 받아들이고,
인간다움과 용서를 얻는 길, 매순간의 거룩한 깊이 뿐만 아니라, 독특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길이 있을 뿐이다.
매우 자주 우리들은 마치도 “정신적인 망원경”을 통하여 보면서 다른 동료인간들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우리가 보는 것이 다 하잘 것 없고 지루하며 의미없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우리의 행복에 대한 갈망이 거룩함에 대한 초대의 길과 합쳐지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집중하고 몰두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새로운 빛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빛 속에서 일상적인 삶은 한없이 가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찬란히 빛나고 생기 돋게 된다.



이러한 생각들의 중요함은 내가 이 책을 거의 끝낼 즈음,
한 오랜 친구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다시 확인되었다.
나는 척 매타이를 28년 전 어느날 밤, 그가 나의 대학 기숙사 방에 나타났을 때 처음 만났다.
나는 그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 몰랐으나, 어쨌건 그의 방문은 나에게 때맞춘 방문이었다.
그 해 겨울 18살이 되어가면서 나는 양심적인 병역기피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며 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던 시절, 내 주위에는 이 병역기피의 문제가 왜 중요한가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척은 이해하고 있었다. 나의 딜레마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는 차를 얻어 타고 주를 넘어 나를 보러 왔다.
후에 알았지만, 척의 이런 태도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도덕적인 갈림길에 선 젊은 사람 누구에게나 자석처럼 달라 붙었다.
어떤 문제이건 간에, 그는 다가와서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상대방이 더 깊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숙고해 보도록 이끌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엄청난 에너지, 사명에 대한 의식,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비전에 매료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척과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며 그의 철학과 삶의 여정에 대하여 나누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징집서를 불태우며 이동하는 평화조성가의 삶을 택했는지 들었다.
할 수 있는 대로 철저하게 그는 비폭력의 정신으로 살았고, 간디, 톨스토이, 도로시 데이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의 가장 중대한 주제는 어떤 상황에 처했건 간에 우리의 응답과 태도를 취하는데 있어 항상 가져야 할 자유였다.
나는 그가 엄격한 채식주의자로서 일주일에 하루를 단식하고,
모든 쇼핑은 값이 싼 떨이시장에서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소유물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고행은 어떤 도덕적인 명분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훈련과 단련의 문제이기도 하며,
어떤 고행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가능한 고행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어떤 완고함이나 도덕주의적인 느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타나시우스 성인이 안토니오 성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그는 전혀 걱정스러워 하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차분하고, 전혀 우울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쾌활하다.”
척은 여정에서 만나는 누구에게나 자유와 책임의 정신을 전했고,
결국 각자의 이상에 따라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표현했다.
이러한 척의 모범에 힘입어서 나는 대학을 떠나 뉴욕에 있는 가톨릭 일꾼으로 가서 도로시 데이와 함께 일했다.
그 후 수년간 척의 여정과 나의 여정은 자주 마주쳤다.
도로시 데이를 존경했지만, 그의 영적인 감수성은 퀘이커의 정신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내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영혼과 다른 이들의 영혼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배려하였다.
실제로 척은 종교적인 표시를 피했고,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조차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산상수훈을 더 철저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꽤 오랫동안 척의 평화조성 에너지는 대안적 경제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비폭력의 원칙들을 가난한 이들의 삶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체화시키고 싶어했다.
그 목적을 위하여 그는 투자기금, 토지신탁, 그리고 기타 프로그램들을 설립하여 수많은 가난한 가족들과
어려운 공동체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과제나 도전이 어떻든지 그는 항상 온 힘을 다해 성심껏 일했다.
그의 어머니가 나중에 말했던 것처럼, “그의 삶은 그의 일이었고, 그의 일은 그의 삶이었다.”

이제 그런 삶이 끝나가고 있었다. 갑상선암으로 오랜 투병을 해 왔던 척은
이제 먹을 수도 없게 되었고 더 이상의 치료를 거부하면서 시골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서 나는 서둘러 그를 보러 떠났으나 만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음날 도착했을 때, 그는 컴퓨터를 무릎 위에 놓고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그는 매우 늙고 약해 보였으나 그 익숙한 정신은 여전히 그의 눈 속에,
그리고 겨우 키보드를 약하게 쳐서 모니터에 나타나는 글 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가 아플 동안 너무나 소원했던 것을 사과했으나 척은 그런 말을 흘려 들으면서,
“우리 둘은 너무나 적절하게 다 바빴다”고 하며 타자를 치면서 “그렇지만 지금 너는 이 곳에 있잖아! ”하고 응답했다.
소식을 이것저것 말하면서 나는 쓰고 있는 이 책에 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무엇이 삶을 온전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밝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 주제에 관해 나도 많은 생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 나누자고 청했다. 그는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병든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화가 나고 두려우며 회한을 느끼지 않는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치명적인 진단을 받으면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르게 살수도 있었는데 하고 방황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혼자 있어 본 적이 없다.
나는 좋은 친구들과 공동체에 둘러싸여 살았고 의미 있는 일을 갖게 된 축복을 받았다.
나는 결코 돈이나 가장 잘난 사람이 되려는 압력 때문에 결정을 해 본적이 없다.
물론 되돌아보면 다르게 처리했었으면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만일 달랐더라면 하는 것은 내가 삶에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는 때때로 용기를 잃게되는 유혹을 받는다고 인정했다.
“도로시 데이가 「긴 외로움」의 후기에서 ‘기쁨의 의무’를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라고 썼던 것을 기억하지.
그러나 내가 누렸던 삶과 오고 있는 마지막을 묵상할 때에 나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삶이었어.
그렇게 좋은 일과 좋은 친구들을 은총으로 받을 수 있었으니’ 하고 생각해.
나는 우리에게 한번도 의미 없는 선택은 없었다고 확신해.
그런데 우리가 속해있는 문화는 사람들을 의미 없는 소비적 선택으로 거의 질식시키면서 가장 중요한
삶의 결정에 있어서는 그들이 너무나 무력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지.­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는 때때로 멈추고 때로는 타자로 쳤던 말을 고치기도 했다. 그는 너무나 쇠약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 대화의 첫 번 주제에 대하여 다시 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들어오는 순간을, 또한 우리 앞에 놓여진 상황들을 선택할 수 없고,
결정을 하거나 그런 결정 때문에 직면하게 되는 결과들을 선택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는 언제나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유물’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존엄성, 성실함, 영혼 같은 것이다. 그 점이 우리를 정의해 주는 결정이며,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첫 번째 ‘삶의 교훈’이지.”
그는 조카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매일 아침 해야 할 결정은, 내가 일어날 수 있고 나에게 주어진 것,
내가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결정이다. 혹은 일어나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난 여기 있네. 움직이기 시작하자!’ 좋은 일. 좋은 친구들, 그리고 훌륭한 가족에 대해 감사하면
‘기쁨의 의무’를 기억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야.”
대화는 그날 늦게까지 계속됐다. 가을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삶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감을 표현하고 후회가 없다고 말했다.
척은 “도스토예브스키는 모든 시대에 소수의 바보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타자를 쳤다.
그날 우리의 대화는 가족, 친구들, 일 등 평범한 일상에 대한 것이었지만
나는 위대한 영혼과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내가 묘사하려고 애쓰는 온전하고도 행복한 삶을 나름대로 찾았던 사람이었다.
28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가 이미 찾은 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날 밤 돌아오면서 나는 나의 아내와 잠들어 있는 아이들,
그리고 해야할 일, 또한 기쁨의 의무에 관하여 생각했다.



이 책에서 생각해 본 성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도덕적 영웅주의, 애덕, 하느님에 대한 열정,
혹은 영적인 삶의 천재성으로 당대 사람들 위에 우뚝 서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적인 삶들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그들의 희생, 비전, 혹은 작은 선행조차 우리들의 능력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안내자로서 별로 의미가 없다는 위험스러운 평가를 내리게 된다.
도로시 데이는 이러한 위험을 민감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당신을 성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라고 데이는 표현했다.

그러나 역사에 나타난 엄청난 수의 거룩한 사람들 중에서 시성된 성인들은 오직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성인들은 직계가족이나 이웃사람들 이외에는 익명으로 남아있고 알려지지 않는다.
이 익명의 성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찬란한 모습이고, 또 어떤 이들은 단순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한가지 필요한 것”만을 이루기 위하여 투쟁했고,
그 한가지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복음의 모습에 그들의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세상의 증가되는 선은 부분적으로 평범한 행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상황은 당신과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다지 나쁘지 않다.
그것은 성실하게 숨겨진 삶을 살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 속에 휴식하고 있는 사람들 덕분인 것이다.
시성된 성인들이 영적인 삶의 천재들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다 천재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친절함과 연민이라는
평범한 행위로 우리의 거룩함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다른 성인들에 의해 부드럽게 다져진 이 거룩함의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우리자신이 행복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화책의 결말 같은 행복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복 속에는 더 크고 더 위대한 어떤 것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며,
그런 결말만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희망을 정당화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교훈은 그 여정의 입구를 제시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더 멀리 나갈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거의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위대한 일처럼, 이 여정도 항상 첫 번 발걸음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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