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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도 「고백록」에서 그러한 순간을 묘사한다. 그가 회심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또한 어머니 모니카가 죽기 며칠 전, 두 사람이 함께 대화를 나누던 중 그런 체험이 일어났다.
수년동안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 때문에 고통을 겪었고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 왔다.
모니카는 단 한가지 목적을 위해 살았다.

아들이 세례 받는 것이었다.
이 목적이 성취된 지금, 어머니와 아들은 어느 날 오후 성인들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눈이 볼 수 없고, 귀가 들을 수 없으며,
어떤 인간의 마음도 알 수 없는 삶,
성인들의 영원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마음의 입술을 그분의 샘,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그분의 샘에서 흐르는 천상의 시내에 대고
그 생명수의 세례를 받으며 할 수 있는 껏, 이 위대한 신비를 이해하고자 한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그들은 그 어떤 신체적 쾌락이나 지상의 기쁨도
“성인들의 삶이 가지는 행복”과 비교할 만한 가치가 없고,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사랑의 불길이 점점 더 강렬하게 타오르면서”
그들을 더 높이 고양시키고 영원한 하느님을 향하게 해준다.
그들의 생각은 “다양한 모든 물질세계 위에 펼쳐지고 천국까지 올라가는데,
그곳에서 태양과 달과 별들이 지구를 비추고 있다.”

시간을 잊어버리고 모자는 상승을 계속한다.
“아직도 더 높이 올라가며, 우리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며, 놀라고 있습니다.
마침내 당신은 우리의 영혼에 다가오시어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진리의 음식으로 영원히 배불리 먹이고
계시는 영원의 풍요로움이 깃든 그곳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끊어질 줄 모르고 더 높이 상승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지혜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갈망하며,
우리 마음의 온 힘을 다해 끌어안을 때, 찰라의 순간, 그것에 도달하고 만져본다.”
그것은 짧은 산꼭대기 체험중의 하나이며 우리가 그것을 움켜쥐려고 할 때에 사라져버리는 그런 체험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영원한 빛과 아름다움의 영역을 만지려고 갈망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보통사람들의 삶에는 아직도 그들이 무엇인가 경이롭고 두려우며 초월적인 어떤 것을 경험했던 때,
자신들만이라도 “이것이 진리다!” 라고 말하도록 하는 어떤 것을 느꼈던 때가 있다.

자신의 회심에 대해 말하면서 도로시 데이는 어렸을 때 시카고에서 경험했던 그런 사건을 포함시킨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옆집에 사는 작은 소녀 캐트린 바렛트를 보러 갔다.
현관, 부엌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도로시는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캐트린의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도로시의 침입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 모습으로 바렛트 부인은 도로시를 돌아보며,
자기 딸과 다른 아이들이 가게에 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기도를 계속했다.

도로시는 “난 바렛트 부인에 대해 사랑의 충동을 느꼈지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 평범한 만남의 기억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도로시가 후에 가난과 불의의 문제에 시달려도
“비참함과 계급투쟁 한가운데에서도 삶의 영광이 빛났던 순간들이 있었다.
바렛트 부인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집에서 아침 10시쯤 설겆이를 끝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런 작은 사건들이 도로시의 장차 올 회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 한 사건은 딸 타말의 출생이었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체험만이 그의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도록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에서 부족한 것에 대한 두려움, 이웃들, 그가 열렬하게 지지했던
가난한 이민자들의 결핍 역시 도로시의 회심에 영향을 끼쳤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충실한 가톨릭인들 이었으며,
그들은 물질적인 고통을 넘어 그들의 삶에 의미를 주는 진리와 가치들을 새기며 살고 있었다.

회심한 후, 그는 몇 년 사이에 피터 모린의 도움을 받으며 가톨릭일꾼운동을 소명으로 삼았다.
그러나 데이는 아직껏 외로움과 슬픔을 느꼈다.
그는 “인간운명의 몹시 비참한 시련에 대해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는 모든 것 안의 거룩함에 대한 깊은 직관을 결코 잃은 적이 없었다.
그는 예수님의 육화에 의해 모든 생명들은 그것이 아름답든 추하든, 은총으로 만져지고 있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과 자연 속의 모든 것들­밤에 짐승의 울부짖음, 바닷가의 미풍 등­은 도로시에게 하느님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불안전 속에서도 공동체 삶이
천국잔치를 일별케하고 미리 알려준다는 믿음을 견지했다.
일과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 물었을 때, 도로시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지요.”

진복의 비전

어거스틴 성인은 그의 책 「신국론」을 천국에 있는 성인들의 활동에 대한 긴 성찰로 마무리한다.
그는 특히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직접 대면” 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약속에 관심을 두었다.
직접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거스틴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성인들은 우리가 지상에서 모든 것을 보듯이, 신체의 눈으로 하느님을 본다는 말인가?
어거스틴은 쉬운 질문이 아니라고 한다.
아마도 어거스틴은 이렇게 제안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보게될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 몸의 눈이 닫히면,
영적인 눈으로 보는 모든 곳에서 하느님이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심”을 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사실인가? 그러한 행복이 가능한가?
그러한 행복은 우리의 현재 삶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지금 행복하고 싶은 욕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 각자는 천국에 대해 생각할 때 제각기 다른 이미지를 떠올린다.
취향도 다르고, 궁극적인 행복이 성취되는 상태에 대한 개념도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다양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즉, 우리는 천국을 우주의 지도에 배치할 수 없다.
천국의 실제를 인간 이성으로 증명해 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이 실제인가?
이것은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과학이나 논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복음에 나타나는 진리는 객관적인 검증이 아니라, 개인적인 결단에 호소하고 있다.
복음서의 진리는 논리적인 삼단논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경험에 의하여 입증될 뿐이다.
그러므로 “어디에 머무십니까?” 라는 일반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제자로 초대하시며 대답하신다, “와서 보라”(요한 1,39).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아는 길들이 있다.
이 시점에서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서술했던 것처럼, 신앙이 대두된다.
“사물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근거, 증거를 갈망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성인들의 체험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그들의 증언에 주의할 수는 있다.
그들은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을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와 그 안의 평범한 삶을 다른 빛으로 인식했다고 증언한다.
쟝 삐에르 드 꼬사드가 성찰한 것처럼, “신앙은 지구를 낙원으로 변화시킨다.
신앙에 의하여 우리 마음은 천국 가까이 있다는 기쁨으로 고양된다.”

“하느님이 계신 곳은 어느 곳이나 천국이다”라고 아빌라의 데레사는 말했다.
그리고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시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이 참으로 천국에 이르는 길,
우리 행복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음을 보고 있다.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을 배우게 될 때, 우리는 그만큼 마지막 행복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행복을 어거스틴은 「신국론」의 끝 찬미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침잠하며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보게 될 것이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게 될 것이고, 찬미할 것이다.”

신앙의 삶이란 반드시 수도원이나 교회에서만 지내야 하는 생활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성인들은 체계화된 종교적 실천과정을 거치며 살았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고,
일찍 일어나 성서를 묵상하고, 묵주신공, 정기적인 양심성찰,
영적 지도자나 수도회 장상들의 충고에 복종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신앙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다.
또한 단식, 쇄신, 축일 등 전례력을 충실히 따랐다.
성인들의 삶을 연구하고, 성지를 순례하며, 성사생활을 했다.
이 모든 것들은 깨어있는 신앙의 눈을 훈련시키기 위한 도구들, 습관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실천하는데 있어 더 중요한 의미는 하느님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을 떼어놓는
삶의 모든 산만함을 차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느님으로부터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오래된 교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기 위하여,
그럼으로써 다음 세상에서 하느님과 영원히 행복하기 위해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 가르침에 대하여 당황스럽고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인과관계를 독단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는 측면이다.
즉 천국, 행복이 이 지상에서 거룩하게 살았던 것에 대한 “보상” 이라고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의 관계 이외에 다른 관계나 연결은 없는 것인가?
만일 거룩함의 길이 또한 행복의 길이며, 영원이란 이 지상에서 우리가 실제로 취했고 추구했던
선택의 봉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교리가 훨씬 더 타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빅토리아시대의 저명한 신학자인 죤 헨리 뉴먼 추기경은 한 설교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왜 거룩해져야 하는가를 물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약함을 고려하여 또 다른 쉬운 기준을 만드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뉴먼은 이런 질문에 대답한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 애써 들어갔다 해도 그는 그곳에서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란 하느님의 현존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이 없는 곳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거룩함이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다주는 어떤 압제적인 승리의 티켓이 아니다.

“천국은 거룩한 사람들에게만 천국이며 행복한 자리이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천국이 될 수 없다” 라고 뉴먼은 말한다.

천국은 거룩한 사람들 이외에는 천국이 아니다.
그러나 거룩함의 여정을 걸으면서 성인들은 토마스 머튼과 함께
“천국의 문은 어느 곳에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빛 속에서 우리는 이 지상의 삶 역시 우리가 거룩해지는 만큼
그리고 신앙의 눈으로 보기를 배우는 만큼, “행복의 자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도스토예브스키의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거룩한 죠시마 신부의 통찰이었다.

“사람들이여, 당신들 주변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보라!
맑은 하늘, 깨끗한 공기, 부드러운 풀들, 새들을.
자연은 아름답고 무죄한데 우리들, 오직 우리 사람들만이 죄가 많고 어리석다.
우리는 삶이 천국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삶이 천국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에만
삶은 우리에게 그 온갖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이며,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울게 될 것이다.”

성인들은 죽음의 경고에 대하여 말하고 영적인 긴박함에 대한 감각을 높여준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자각은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때에 양성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자.

네덜란드의 가르멜회 사제였던 티투스 브랜스마는 유대인들을 옹호하다가 나치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다카오 수용소에서 이러한 메시지를 보내온다.
“나는 그분의 손이 하시는 일 속에서 하느님을 뵙고
모든 보일 수 있는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의 흔적을 본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기쁨을 넘어서는 최고의 기쁨에 사로잡힌다.”

무엇보다도 이런 자각이 우리세계에 너무나 필요하다.
이 자각은 삶이 그 모든 불합리함과 잔인함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의미로 가득 차 있으며,
선하다는 확신을 고무시킨다. 또한 노르위치의 쥴리안이 말했듯이 이 자각은,
“모든 것이 좋을 것이다. 모든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의 모습이 좋을 것”이라는 희망을 지지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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