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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정광수 바르나바 · 윤운혜 루치아 부부

▣ 함도 못받고 올린 혼인식  
난 이 글을 쓰면서 이 세상 모든 부부들이 정광수·윤운혜 부부처럼 살고 있으리라 믿으며,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가난하면서도 소박한 부부의 사랑을 키우며, 항상 주님을 가장 윗자리에 모시고 살았던 부부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이들 부부의 삶을 엿보기로 하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고도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경기도 양근의 대감마을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는 아주 조촐한 혼례식이 베풀어지고 있었다. 혼례당사자는 여주 가마골(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의 정광수(바르나바)와 한감개의 윤운혜(루치아)였다. 조선중기부터 정착된 전통의 ‘친영(親迎)’ 예절에 따라 가마골의 정광수가 새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맞이해 가기 위해 먼저 신부집에 와서 혼례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정광수(바르나바)와 윤운혜(루치아)의 부모는 이미 오래 전에 둘의 혼인을 허락하고 편지를 주고받은 상태였다. 또 신랑의 사주를 신부 집에 보내는 ‘납채’, 신부 집에서 혼례 날짜를 적어 신랑 집에 보내는 ‘연길’이 모두 끝나고, 신랑 집에서는 신랑의 의복 치수를 적은 ‘의제장’을 이미 신부 집에 보냈었다. 그런데 이 무렵 비신자였던 정광수의 부모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양근의 새 신부가 천주학쟁이라는 것이 아닌가!  

결국 정광수의 부모는 혼서(婚書)와 채단을 담은 ‘납폐함’ 즉 함(函)을 신부 집에 보내지 않았다. 이처럼 딸이 혼서도 받지 못하고 혼례를 올리게 되었으니, 윤운혜의 어머니 이씨 부인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돈 내외, 게다가 신앙을 증오하는 사돈 내외에 대한 의구심, 그러한 집으로 귀여운 딸을 보낼 수밖에 없는 불안함에 이씨 부인은 그날 내내 눈물을 훔쳐야만 하였다.

혼서가 없는 혼례. 지금과 같이 자유롭게 혼인할 수도 없는 당시로서는, 더욱이 양반 집안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오직 신앙의 힘 때문에 가능한 결혼이었다. 그러니 신랑 집으로 가는 신행길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사모와 자색 단령, 족두리와 원삼, 말과 꽃가마가 가당키나 하였을까?  

한감개에서 첫날밤을 지낸 윤운혜(루치아)는 정광수(바르나바)를 따라 친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편의 고향 여주 가마골로 가서 시집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들의 신혼 생활은 쉽지 않았다. 비신자인 시부모들은 윤운혜에게 온갖 미신 행위를 강요하였고, 그때마다 그녀의 신앙은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운혜는 온갖 정성을 다해 시부모를 봉양하였으며, 남편 정광수와 함께 하는 기도 생활을 유일한 낙으로 삼아 신앙을 꿋꿋하게 지켜나갔다.  

사실 윤운혜(루치아)가 혼례식을 받아들이게 된 배경에는 남편 정광수(바르나바)의 신앙이 있었다. 그녀는 오직 이 하나만을 의지했고,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끝까지 신앙을 지켜나가기로 남편과 굳게 약속했었던 것이다.

정광수(바르나바)는 어떤 분인가? 여주 가마골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1791년 한감개에 살고 있던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교회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입교함으로써 마침내 신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정광수(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진리에 상당한 감명을 받고 신앙생활에 깊이 젖어들었다. 또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한양으로 올라가 주신부에게 직접 성사를 받고 교리도 배웠다. 그런 다음 주신부의 명에 따라 여주 김건순(요사팟)과 동료들을 입교시키는 중개자 역할을 하였으며, 고향 인근에 교리를 전하면서 비신자를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정광수는 부모나 여동생 정순매에게도 자주 교리를 설명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이해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전통을 고수하는 부모들은 막무가내였고, 오히려 갖은 방법과 유혹을 다하여 천주교로부터 아들을 떼어놓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운혜(루치아)가 정광수(바르나바)와 혼인하였으니, 며느리에 대한 시부모들의 미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 부부 삶의 사표(師表)... 한국 최초의 성물방
어느 날 정광수(바르나바)는 아내와 함께 기도를 드린 후 한양으로 가서 살자고 제의하였다. 비록 부모에 대한 효의 도리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위에 계신 대부모(大父母)께 대한 효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799년, 마침내 정광수(바르나바)와 윤운혜(루치아) 부부는 여주 가마골을 떠나 한양 벽동(현 종로구 송현동)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이미 열심한 신자가 되어 있던 윤운혜의 시누이 정순매(바르바라)도 그들 부부와 함께하였다. 이곳에서 그들 부부는 자신의 집 한켠에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필요할 때마다 이곳을 교우들의 집회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 무렵 벽동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필립보), 김계완(시몬), 홍익만(안토니오), 강완숙(골롬바), 정복혜(칸디다) 등 이었다.  

본래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던 정광수는 아내 윤운혜와 밤낮으로 성서와 교리를 강습하고, 여러 교우들과도 주야로 강학을 하곤 하였다. 또 교우들에게 나누어줄 교회 서적을 베끼는데 하루를 다 보내곤 하였다. 또 윤운혜와 함께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이나 묵주 등을 제작하여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주었는데, 그 결과 교우들은 “벽동에 가면 언제든지 원하는 서적과 성물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그들 부부의 집은 이처럼 ‘한양의 성물 보급소’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로 언니 윤점혜(아가타)가 체포되자, 윤운혜(루치아)는 자기 부부도 오래지 아니하여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실제로 박해 초기에 이미 그들 부부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고발되어 있었다. 이에 윤운혜는 남편 정광수를 지방으로 피신시킨 다음,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의 집으로 옮겨 숨겨놓았다. 그리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그곳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윤운혜(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밝혀진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배교도 거부하였다. 이렇게 미동도 하지 않는 윤운혜의 굳건한 신앙의 모습을 보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윤운혜(루치아)는 서소문 밖 형장에서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참수치명 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윤운혜(루치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교회 서적과 성화·성물들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 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아내 윤운혜(루치아)가 순교할 당시, 정광수(바르나바)는 한양과 지방을 오가면서 이리저리 피신해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포졸들이 수사망을 좁혀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의 피신을 단념하고 1801년 9월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정광수(바르나바)는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혹독한 형벌 가운데서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신자들을 밀고하라는 명령도 거부하였다. 그런 다음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다시 고향 여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정광수(바르나바)가 형조에서 마지막으로 진술한 내용을 들어보자. 저는 양반의 후손으로, 나라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졌습니다.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주문모 신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였습니다.…… 또 천주교 성물을 만들어 곳곳에 배포하였고, 교우들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노력하였으니, 그 죄로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밖에 없는 혼례식도 이가 빠진 모습처럼 초라하게 치루어야 했지만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했던 부부이다. 그 사랑의 끝이 하느님께로 향해 있었기에 더 속 깊은 사랑을 했던 부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님말씀에 심취했던 부부, 주님의 모습을 전하고자 손가락에 피멍이 들어가며 성물을 만들던 부부,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고백한 부부. 이들 부부의 삶은 오늘을 사는 모든 부부들에게 등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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