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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압록강을 넘어 북경으로
1996년 우리 교구에서 시복 시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첫 번째로 선정한 순교자. 그리고 같은 해 10월 1일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하느님의 종’으로 인정받은 순교자. 또한 한국 천주교회의 첫번째 밀사. 우리는 그를 “고난의 밀사”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애칭치고는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가 너무나 가슴 저리다. 이 애칭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윤유일 바오로(1760-1795년)이다.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에서 태어나 양근 땅 한강개로 이주해 살던 윤유일이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 배경에는 같은 마을에 살던 권씨 형제가 있었다. 지난 호 에서 이야기했던 권철신이 학문의 스승이었고, 아우 권일신이 신앙의 스승이었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  또 얼마나 잘 만난 스승과 제자란 말인가. 윤유일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한두 해 뒤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서른 살 때인 1789년 교회 밀사로 선발된다. 지도층 신자들이 모방성직자단(가성직자단)을 해체하고 평신도의 성사 집전이 교리에 위배되는지를 묻기 위해 북경 교회에 파견할 밀사를 구하자, 스승 권일신이 그를 밀사로 천거한 것이다. 이로써 그가 초기교회 내에서 얼마나 신뢰받고 있었는지 그리고 신앙적으로, 학문적으로도 출중했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789년 10월, 윤유일은 하층 상인으로 위장을 하고 북경으로 가는 사신 행렬에 끼게 된다. 사신 행차만이 국경을 넘어 북경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아무리 하층 상인이라 할지라도 사신 행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주고 그 자리을 사야했으며 연줄도 있어야 가능했다.  

이제 그는 눈보라 치는 압록강과 만주 벌판을 건너 북경을 향해 힘겨운 길을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눈보라 치는 매서운 추위보다 더 그를 힘겹게 한 것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과, 옷속에 숨긴 스승 권일신과 이승훈의 편지가 발각될까 노심초사한 일이었다. 비단에 쓰인 신자들의 편지는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져 윤유일의 솜옷 이곳저곳에 꿰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윤유일은 북경으로 가서 남당(南堂)에 거주하고 있던 구베아(Gouvea, 湯)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1789년 12월 22일(양력 1790년 2월 5일)에는 북당에서 라자로회로(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로 세례(조선에서의 세례가 합당했었는지 의심이 되어)를 받고, 구베아 주교로부터 견진성사까지 받았다. 대부는 예수회원이며 궁정화가인 판지(Panzi, 潘) 수사였는데, 그는 윤유일의 모습을 그려 로마로 보냈다. 조선 신자로서는 처음 받는 견진성사였으니, 얼마나 감격이 컸을까? 구베아 주교와 중국 선교사들은 당시의 벅찬 감격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편지에 담아 고향으로 보냈다.

“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하는 윤유일 바오로의 덕성과 열정을 보면서 주변에 있는 목자와 양떼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가슴 벅찬 흥분은 이후 며칠 동안 북경 신자들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 위에 내렸던 것입니다.”

▣ 끊임없는 성직자 영입
중국 북경으로 가는 길. 윤유일에게 있어 그 길은 가슴 벅차면서도 위험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양에서 북경까지의 길은 어림잡아 3천여 리. 실제로는 왕복 7천리가 족히 되는 거리이다. 한겨울의 벌판 노숙,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길과 고개. 발은 수없이 부르텄고 노숙에서 오는 한기는 언제나 밀사를 괴롭혔다. 어디 이뿐이랴. 의주 변문에서의 검색은 또 얼마나 삼엄한가. 그리고 관문 검색 시, 걸리는 자는 그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곤장에서부터 유배, 심지어 참수형에 까지 처해 질 수도 있었다. 더욱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닥쳐올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러한 길을 우리의 밀사는 두 차례나 왕복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굳은 신앙과 밀사로서의 책임감을 지닌 윤유일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두 번째로 북경에 가게 되는 때는 1790년 5월, 북경에서 돌아온 지 2개월 후였다. 이번에는 그의 어깨에 ‘선교사 영입’이라는 막중한 임무가 메어졌던 것이다.

윤유일이 두 번째로 북경에 갔을 때, 구베아 주교는 그에게 조선에 파견할 선교사와 밀사가 만날 시기, 방법과 장소 등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제사 금지령’이 담긴 사목서한과 성작, 미사 경본, 성석(聖石), 포도나무 묘목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사주를 마련하기 위해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는 법과 포도주를 만드는 방법까지 일러주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달리 결정되어 있었다. 1791년 초 윤유일이 구베아 주교와 약속한 대로 다시 중국과의 국경 지역으로 갔지만 선교사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아쉬움을 안고 조선으로 되돌아온 윤유일을 기다리는 것은 박해뿐이었다. ‘제사 금지령’에 의한 제사 폐지 문제로 야기된 신해박해(辛亥迫害,1791 정조15)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순교자들의 탄생.  

신해박해로 인해 1791년말 부터 1793년말 까지 2년 동안 북경교회와 조선 교회의 연락은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단절이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니, 영신적인 구원을 갈망하던 조선 교우들이었기에 절대로 성직자 영입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해가 끝나자마자 총회장 최창현, 여성 지도자 강완숙, 전라도의 유항검, 한때 마음이 약해졌다가 다시 교회 품을 찾은 최필공 등 지도층 신자들은 다시 북경 교회와의 연락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밀사 윤유일은 바로 이 시기에 최인길(마티아)과 지황(사바)을 동료로 맞이하였으니, 그들은 이때부터 죽는 그날까지 한마음 한 뜻으로 생활하게 된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교우이자 동료요 형제였다. 그들의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 그러니 어찌 이 선조들의 생애를 따로 떼어 이야기할 수 있으랴!

  최인길은 누구인가? 서울의 역관(통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 창설 직후에 입교하였고, 온 집안 식구를 신앙으로 인도한 선구자였다. 또 지황은 누구인가? 서울의 궁중악사 집안에서 태어나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스스로 교우들을 찾아가 교리를 배운 신입 교우였다. 윤유일과 함께 이 두 분은 성직자 영입과 교회재건을 위해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바친 분들인 것이다. 뜨거운 땀방울과 기도로 이어진 윤유일의 머나먼 이역만리 길은 십자가의 길이기에 항상 주님의 보호와 은총이 가득했네!

▣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입국
1793년 말, 신부 영입에 실패한 조선교회의 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다시 한번 신부 영입을 위해 지황(사바)을 밀사로 선발하여 북경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지황이 떠나기 며칠 전, 윤 유일은 신자들을 대표하여 구베아 주교에게 전할 편지를 작성해 나갔다.

“2년 전의 신해박해로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면서 보여준 기적(‘참수형을 당한 시신을 친척들이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로 적셨으며, 당시 죽어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구베아 주교가 St. Martin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편지에서-)을 목격한 교우들은 북받치는 눈물 속에서 찬미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제 그들의 피를 적신 수건 몇 조각을 주교님에게 보내드리오니…”  

그렇게 윤유일은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보여준 기적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내심 자신도 그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밀사 지황이 북경을 향해 역경의 여정을 시작할 무렵,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마음속으로는 이미 제자 신부 하나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해 놓고 있었다. 광동성 소주에서 태어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바로 그였다. 그는 구베아 주교가 설립한 북경 신학교의 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와 지황이 북경의 남당에서 만난 것은 1793년이 마지막 숨을 다해가던 때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초, 주문모 신부와 지황은 각각 다른 길로 중국과 조선의 국경 지대인 ‘책문’(柵門)으로 가서 다시 만났다. 그러나 주 신부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양떼들이 기다리고 있는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국경 감시가 심해진데다가 압록강의 얼음마저 녹고 있었으며, 설령 배를 구한다고 해도 도강하기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의주에서 지황을 기다리고 있던 윤유일과 동료들의 실망이란…

주님의 섭리를 기대하면서 그들은 다시 서울로 가서 겨울이 오기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그때 이미 최인길(마티아)은 서울의 북산(북악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계동 마을 안쪽에 집 한 채를 마련해 놓고 있었는데, 목자를 모시기 위한 집이었다. 1794년 겨울, 또다시 윤유일과 동료들은 서울을 떠나 의주로 출발하였다. 그런 다음 지황은 주 문모 신부를 영접하러 책문으로 떠나고, 나머지 동료들은 의주 객주에서 목자를 기다렸다.

드디어 12월 3일(양력 12월 24일), 그 해의 성탄 전야. 마침내 주문모 신부는 지황과 함께 의주성의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입국한 뒤, 꽁꽁 얼어붙은 조선 땅에 친구하였다. 그리고 곧 이어 이루어진 주문모 신부와 조선 교우들의 감격적인 만남! 그들은 걸어서 12일 만에 서울 계동의 은거지에 도착하게 된다. 성사의 은총을 얻게 된 조선 교우들의 그날의 기쁨이야...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기쁨인가! 어떤 글과 말로 표현하겠는가!  무엇과 바꾸겠는가! 이 기쁨이 영원히 조선교회에 머물며 함께하길 바라고 또 바랐지만 이것은 또 다른 수난의 시작이었다.

▣ 윤유일과 동료들의 순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최인길은 강완숙, 최창현, 최필공 등과 함께 목자를 보호하는데 전심 하였다. 특히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의 조선말 선생 역할을 하면서 그의 지시를 교우들에게 전하는 일도 담당하게 되는데, 그의 출신이 역관 집안이고  오랫동안 중국어를 익혀왔기 때문이다.  

한편 윤유일은 주문모 신부의 지시를 받고 다시 한 번 책문으로 가서 전교비로 사용할 은자와 성유를 받아와야만 하였다. 그리고 1795년 4월 5일(음력 윤2월 16일)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주문모 신부는 몇몇 교우들과 함께 이 땅에서 최초로 미사성제를 봉헌하였다. 감격과 환희의 눈물. 다만 모든 교우들이 이 은총의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것만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아! 그러나 신앙을 증오하는 무리들은 교회의 평온을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얼마 동안의 조선 교회의 기쁨은 한 밀고자에 의해 깨지고 말았으니,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과 거처가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우리의 신앙 공동체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 참으로 긴박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인자하심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이다.

조정의 체포령을 받은 포졸들은 이내 계동 신부 댁으로 몰려가 한 중국인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안 되어 그가 진짜 중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말았으니, 그는 중국말을 잘하는 최인길이 변장한 가짜 신부였던 것이다. 이러한 임기응변 덕택으로 주문모 신부는 박해자의 손아귀를 벗어나 남대문 안에 있던 여회장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최인길이 체포된 지 얼마 안되어 지황도 중국인을 인도해 온 죄로 체포되었고, 멀리 양근으로 파견된 포졸들은 그곳에서 윤유일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포도대장은 갖은 수단을 다 써서 주문모 신부의 종적을 캐내려고 하였고, 또 그리스도께 악담 하며 저주하도록 명령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며 차라리 천 번이라도 죽으라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나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나 저주의 언사는 도저히 차마 토할 수 없노라고 대답하였다. 포도대장은 미친 듯이 극단에 이르도록 온갖 종류의 형벌을 다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밀사들은 곤장, 주뢰형, 뼈를 부러뜨리는 형벌 등 갖은 악형을 당하였지만 끝내 굽히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결국 밀사들은 죽을 때까지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야만 했다. 마침내 윤유일, 최인길, 지황은 육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였으니, 때는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윤유일(바오로)은 36세, 최인길(마티아)은 31세, 지황(사바)은 29세였다. 이처럼 매를 맞아 순교한 세 밀사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져 버리고 말았다.  

“가세 가세 찾아가세, 우리 본향(本鄕) 찾아가세.”  그들을 실은 강물은 천상의 영광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윤유일 순교자. 북경까지 두 번, 책문까지 두 번, 고난의 길을 걸어 조선교회의 성직자 영입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하루도 쉴 날이 없이 분주히 전교를 하며살아오신 분! 우리와 같이 이 땅에 사셨던 신앙의 큰 어른! 교형자매여, 윤유일 순교자의 숭고한 정신과 삶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도 진정한 신앙의 어른이 되도록  합시다.

♣ 치명하신 윤유일 어르신을 기리며...

윤유일과 나  
세월은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는,  맡겨진 시간들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세월의 가치는 정해진다.  순교자 윤유일(바오로)에 대한 글을 마치는 지금, 내 가슴 깊은 곳까지 스미는 그분의 향취를 어떻게 글로써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고난의 밀사 윤유일! 그는 하느님께로 향한 뜨거운 피와 아울러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황들을 올바로 식별하는 냉철한 이성을 가진 순교자이다. 그는 엄동설한도, 스스로 택한 천한 신분의 삶도, 수 없는 고통의 산과 끝이 보이지 않는 가시밭길도 희망을 안고 기쁨으로 걸어가신 위주치명자(爲主致命者)였다.

이렇게 순교자 윤유일이 함께했던 그 시간들이 오늘 나에게 거룩한 시간으로 다가오듯이 나 또한 후손에게 거룩한 시간을 남겨줄 수 있도록 다짐해본다.


멀고먼   중국북경   고난의길을
한마디   원망없이   걷고걸었네.
단하나   조선구원   소망을품고
칠천리   엄동설한   압록강건너

신앙의   다리놓아   주님모시고
신부님   모셔올길   닦아놓았네
바라고   또바라던   사제모시니
이제는   그무엇이   또남았으랴

작당한   박해무리   혈안이되어
윤유일   사학괴수   때려죽이네
그육신   땅에묻기   과분타하여
시퍼런   강물속에   던져버렸네

그러나   그강물은   천국향하네
일평생   쟁기잡고   돌아봄없이
세상의   모든것을   천주께바친
치명자   윤유일의   공덕과함께      


2003년 3월 5일  재수요일에 ..... 구산 성지 주임 정종득(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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