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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조용삼 베드로

2011.07.09 21:07

기도방지기 조회 수:1170

||0||0조용삼 베드로

▣ 아버지와 아들의 슬픈 이야기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가슴 저리고, 마음 쓰라린지 형언할 수 없다. 차라리 다른 분의 글을 쓸  걸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아버지와 아들. 순교할 것이라고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아버지는 혹독한 형벌로 인해 신념이 무너지고 낙망하여 쓸쓸히 관아를 나가고,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예비신자인 그의 아들. 그렇게 배교한 아버지에 대해 실망이 아니라 다시 주님의 품안으로 돌아오도록 처절한 몸부림의 기도를 올렸을 아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나는 온 몸이 감전된 듯 했다.  

그 아들 조용삼(베드로) 순교자는 누구인가?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그는 상처를 하고 빈궁에 빠져 고향을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여주에 살고 있던 임희영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다. 그는 가련한 가난뱅이이며, 홀아비의 아들이었다. 거기다가 몸과 마음이 약하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며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총각이었다. 이웃들은 그를 사람 축에도 끼워주지 않았고, 또 그를 볼 때마다 측은하게 여기거나 놀리기도 하였다. 그러니 그런 그에게 누가 귀한 딸을 주겠는가. 그래서 그는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조용삼(베드로)에게도 큰 행운이 찾아왔으니, 바로 광주 땅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살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회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정약종 회장은 조용삼의 보잘것 없는 외모 안에 숨겨져 있는 ‘위대한 영혼’을 발견하고는 그를 만날 때마다 존경심을 갖고 대해 주었으며, 자주 그의 신앙과 덕행을 칭찬해 주었다. 조용삼은 이내 천주교 교리를 통해 진리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러다가 조용삼이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가서 동료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부활대축일 행사를 지내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조용삼(베드로)의 용기가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용덕을 보고 누가 예비신자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신앙은 완덕에 가까이 가 있었다. 그는 이제 가난뱅이도 아니었고, 남들이 비웃는 심약한 인간도 아니었다.

신앙에 있어서는 그 누구 못지않게 부유하였고, 강한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포졸들까지도 그처럼 약해 보이는 조용삼이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으며 굳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으며, 이에 화가 나서 더욱 세게 매질을 하였다. 그렇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박해자들은 이미 천주께 등을 돌린 조용삼(베드로)의 부친을 끌어내서는 아들에게 배교할 것을 종용케 하고, 조용삼에게는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며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이에 조용삼은 마음이 약해져 “인륜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저 때문에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하기를 원치 않으니, 우리 둘을 다 살려 주십시오”하며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본심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어 그를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배교를 선언하고 관청 문을 나서던 그에게 이중배(마르티노)를 만나도록 해주신 것이다. 조용삼(베드로)은 이중배(마르티노)가 깊이 통회 할 것을 권면하는 말에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 안으로 들어가 “방금 전에 제가 내뱉은 말은 저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결코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습니다.”하고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후 조용삼(베드로)은 동료들과 함께 경기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겸손한 통회와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착한 행동과 아름다운 말로 옥중에 있는 모든 신자들을 감동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옥중에서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조용삼(베드로)은 다시 한번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또 한 차례 큰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으며,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음을 당하는 것뿐이오니, 이 밖에 무슨 말씀을 드릴 것이 있겠습니까.”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굳건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제 이미 많은 형벌로 약해져 있던 그의 몸은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3월 27일(음력 2월 14일), 형리들이 그를 다시 옥으로 데려간 지 며칠 뒤에 조용삼(베드로)은 조용히 하느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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