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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원경도 요한 ....

2011.06.05 18:51

기도방지기 조회 수: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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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도 요한 ....
▣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오직 기도 소리일뿐…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여주에서 순교한 이들은 앞서 이야기 한 이중배(마르티노)를 비롯하여 그의 사촌 원경도(요한), 원경도(요한)의 장인 최창주(마르첼리노), 세례명을 알 수 없는 임희영과 정종호 등 5명 이었다. 임희영은 체포될 당시까지도 비신자였지만, 교우로 선종한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함께 있는 교우들에게 교리를 배웠다. 아마도 그는 옥중에서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정종호는 일가족 모두가 열심한 교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00년의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교우들이 준비를 한 곳도 바로 그의 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례명을 알 수가 없어 우리 수원교구에서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지는 못하였다. 우리의 신앙선조, 순교자들 중에는 이렇게 세례명(=본명)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제 원경도(요한)에 대해 알아보자. 1773년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사신>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아주 늦은 나이에 혼인을 하였는데, 교우인 최씨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여주에서 함께 순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는 그의 장인이며, 두 사람은 함께 옥살이를 했었다.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원경도(요한)는 24살 되던 1797년에 사촌 이중배(마르티노)와 함께 김건순(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런 다음 온 가족에게 힘써 복음을 전하였고, 가족들도 대부분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수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원경도(요한)는 손수 베낀 교리서와 묵주·성화 등을 가지고 다니면서 친척들을 개종시키는 데 노력하여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제삿날이 다가오자 원경도(요한)는 형(원경신)과 의논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하였다.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1800년의 부활 대축일이 되자, 원경도(요한)는 이중배(마르티노)와 함께 동료 정종호의 집으로 가서 대축일을 준비하고, 남한강변에 모여 부활축제로 하루를 즐겁게 보내다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체포된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경도(요한)의 깊은 신앙은 이 순간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사학쟁이들이 무더기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이내 온 고을에 퍼져나갔고, 원경도(요한)의 가족들도 곧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집은 남한강에서 여주 관아로 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그가 관아로 끌려간다는 것을 알게 된 노모는 집 앞에 나와 있다가 포졸들을 보자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한 번 보게 해 달라’ 부탁하였다. 그러나 매정한 포졸들이 이를 들어줄 리 있겠는가.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여주 관장은 “얼른 천주교를 버리고 너희를 꾀어 사학에 물들게 한 자와, 함께 사학을 한 공범자들을 밀고하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원경도(요한)는 동료들을 대표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주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천주를 배반하라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그의 애주애인(愛主愛人)의 정신은 외교인까지도 탄복하였다. 이후에도 원경도(요한)와 동료들은 6개월 이상이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옥중에는 후에 체포된 장인 최창주(마르첼리노)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를 위로해 가면서 '이 환난을 굳게 이겨내자'고 다짐하곤 하였다.  

▣그의 몸에 기적의 명약이 있었네...
원경도(요한)는 그 동안 여러 차례의 형벌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곤장을 맞고, 주리형을 받고, 주장질을 당하기를 여러 차례…… 그런데 그때마다 그가 입은 상처가 기적적으로 낫는 것이 아닌가. 형리나 옥졸들도 이 사실을 보고는 자기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것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우리가 무엇에 홀려 있는 것은 아닌가. 저 고집스러운 사학쟁이가 기적의 명약이라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하느님은 참으로 원경도(요한)를 통해서 당신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전지전능하심을 모든이에게 드러내고 계셨다.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교우들에게는 용덕을, 외교인들에게는 당신을 믿게 하시려함이 아니겠는가 !  

어느 날 원경도(요한)의 집에 살고 있던 늙은 여종이 옥으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원경도(요한)에게 다가가 집에 있는 노모와 아내가 슬퍼하는 가련함을 전하면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옆에 갇혀 있던 사촌 이중배(마르티노)가 여종을 바라 보면서 눈을 부릅뜨자, 그 여종은 겁에 질려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원경도(요한)가 육정(肉情)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1800년 10월, 원경도와 동료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경기감영은 지금의 서울 서대문 위쪽 영은문 근처에 있었으니, 여주에서는 제법 먼 거리였다. 그리고 다음해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 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원경도(요한)는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 나갔다.

그때까지 비신자였던 임희영도 교우들과 함께 감사 앞에 출두하여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감사가 그에게 ‘너는 천주교인이 아니니 나가서 제사를 지내겠다고만 하면 석방해 주겠다’고 하였으나, 임희영은 ‘고인이 되신 부친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원경도(요한)는 옥으로 돌아온 뒤 임희영에게 “당신은 주님을 숭배하지 않으므로 형벌을 받기보다는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라고 말을 넌지시 건넸지만 임희영의 마음은 아버지와의 신의를 굳게 지키기로 이미 작정하였다.  

그의 굳건한 모습을 보고 이때부터 원경도(요한)와  동료들은  임희영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는데 힘썼다. ‘열심한 교우였던 부친처럼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이 더 큰 효도가 된다’는 것을 되짚어서 설명해 주자, 마침내 임희영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주 적절한 때에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 그에게 내려진 것이다. 감사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옥에 있는 사학쟁이들의 마음을 돌려놓음으로써 공을 자랑하려 했던 생각이 다 틀려버리고 만 것이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원경도와 동료들을 끌어내 문초를 시작하였다. 그런 다음 전혀 동요하지 않는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기 위해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때 감사가 내린 원경도(요한)의 사형 선고문에는 “천주교에 깊이 미혹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의 지시대로 형에게 제사를 폐지하도록 권하였으니,  이는 인간의 도리를 모두 끊어 버린 행위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후 조정에서는 “사학쟁이들을 모두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원경도(요한)는 동료들과 함께 다시 여주로 압송되어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2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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