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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한재권 요셉

2019.08.11 08:59

기도방지기 조회 수:103

 

저는 하느님을 위해 생명도 바칠 각오가 돼있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렬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령님 영혼안에서 기적을 행하시는분

저희를 이끄시어 깨어있는 가운데 완덕의 길을 가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하느님 저희를 불상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 한재권 요셉을 본받게 하소서 ! 

성 한재권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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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한재권 요셉(韓-- Josephus, 탁희성 비오 작)


한재권 요셉 성인의 이름과 세례명은 탁희성 화백이 이 성화를 제작할 당시에는 한원서 베드로로

알려졌었습니다. 그 후 교회사가들의 연구를 통해 한재권 요셉(또는 베드로)으로 정정되었습니다.

 

 

성 한 요셉(재권)은 자가 원익(元益)이었고 (동생 元端과 바뀌었다고함) 1834년에 독실한 신자였던 부친 

한언적(韓彦蹟ㆍ도미니꼬)과 모친 성주 배씨(星州 裵氏)사이에 장자(長子)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 막달레나와 혼인했으나 끝내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의 부친은 충청도 진잠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전라도 고산 다리실(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 공소)로 피신 했으며 그 후 그 가족들은 다시 대성동 

신리골(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로 이사하여 살다가 병인교난을 맞이했다.

 

한요셉은 충청도 진잠에서 회장을 지냈으나 대성동에 이사온 후에는 손베드로(선지)가 이미 회장직에 

있었으므로 그 직책을 그만두었지만 훌륭한 표양과 모범적인 신앙 생활로 교우와 외인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866년 12월 3일 저녁 포졸들이 그의 마을을 급습하였을 때 그는 전혀 모르고 집에서 장작을 패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전주 감옥에 수감되자 그의 부친은 친구 박별감을 통해 그의 석방을 교섭하는 한편 

간절한 편지로써 옥중에 있는 한 요셉에게 배교 하기를 간곡히 타일렀다. 그러나 그는『배교 하란 말은 

부당합니다. 아버님이 아무리 애쓰셔도 소용없는 헛고생 이십니다. 저는 하느님을 위해 생명도 바칠 각오가 

돼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거절했으나 그의 부친은 감옥에까지 찾아들어와 배교를 간청하였다.

 

 이에 그는『아버님! 아버님은 저말고도 여러 형제가 있으니 저를 없는 아들로 여겨 주시고 돌아가 주십시오』

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물론 그의 심정은 말할 수 없는 번민과 부친이나 가족에게 대한 근심으로 

가득채워졌으나 한 요셉은 이러한 영육의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순교할 수 있는 용덕과 신앙심을 

간직하도록 항상 기구하면서 이 고통을 극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도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아들을 위해 포도청 관리에게 뇌물을 계속 보내주었다. 그랬으므로 관리들은 한 요셉을 여러모로 놓아주려고 갖은 고문을 하지 않으며 온갖 감언이설로 유혹했으나 끝내 배교하기를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형에 처하기 위해 장계하고 말았다. 물론 그는 수차례의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1866년 12월 13일 자신의 가장 큰 소망대로 전주 숲정이 사형장에 나아가 참수형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31세였고 그의 시체는 처음에 용마루 재에 묻혔다가 그 다음해 3월초에 그의 

가족들에 의해 전주 지방 고산 다리실에 묻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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