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타이틀1

슬라이드 타이틀2

슬라이드 타이틀3

성 우세영 알렉시오

2019.05.12 13:16

기도방지기 조회 수:134

 

우리는 우리의 입과 손으로 하느님을 끊어버렸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무슨 낯으로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땅을 밟을 수 있으며,

슨 면목으로 하느님이 지어주신 하늘을 쳐다보며,

땅과 하늘사이에 깔려 있는 하느님의 물건을 감히 쓸수 있읍니까? 

 

하며 통곡 하던 알렉시오는 

장주교가 잡혀있는 서울 포도청으로 가 군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고백한 후 장주교를 만나 지난일들을 사죄받고 

장주교와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로 결심하였다. 

 

성령님 흘러넘치는 은총의 보고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고통의 가치를 깨닫게 하소서 !

주님 찬미 받으소서 ! 

 

거룩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저희가 성 우세영 알렉시오를 본 받게 하소서 !

성 우세영 알렉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9.89.jpg

 

성 우세영 알렉시우스(Alexius, 또는 알렉시오)는 세필이라고 불렸는데, 황해도 서홍 땅에서 대대로 선비생활을 하던 양반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그는 16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만난 김 요한이라는 전교회장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삶의 의의와 보람을 느끼게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을 외면한 채 집을 나와 몇몇 예비신자들과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찾아갔다. 그를 만나본 베르뇌 주교는 그의 학식과 신앙과 열성은 대견스러우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주위 환경이 너무 어려워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선뜻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하였고, 결국 그는 정의배 마르코(Marcus) 회장의 인도를 받아 알렉시우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갔다.

   막상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천대가 대단할 뿐 아니가 수개월 동안 계속되는 저주와 악담까지 참아 받아야만 했고, 마침내 남의 구설수에 오르기가 두렵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그를 감금하기까지 하였지만, 그는 모든 것을 양순함과 인내로써 잘 이겨냈다. 그 후 그는 “차라리 네가 집에 없으면 죽은 것으로 여겨 위안이 될지 모른다.”는 부친의 말을 듣고, 집을 떠난 서울의 정 마르코 회장 집에 일 년 동안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집안 식구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교리서 번역과 십이단 편찬에 전력하였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아버지도 아들이 믿는 천주교에 관심을 보였으므로, 그가 차근차근 천주교 진리를 설명해 드린 결과 온 가족들과 이웃 등 20여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가 있었고, 정부에 대한 고발 소동이 일어나자 하는 수없이 모든 가산을 버리고 평안도 논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후 1866년 정초에 알렉시우스는 정 마르코 회장을 찾아가 세배를 하였는데, 포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와 정 회장을 잡아갔다. 처음 심문과 고문은 잘 참아 받았으나, 두 번째에는 위협에 못 이겨 배교하였다. 그러나 곧 참회와 식음을 전폐하는 극기를 통해 마음을 다시 굳히고 포도청으로 나아가 옥중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 지난 일들을 사죄받았다. 이윽고 그는 평온한 마음을 되찾고 용덕을 더욱 발휘하여 모든 고문을 잘 참아 견디었으며, 혹심한 곤장과 많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신앙을 용감하게 고수하여 기다리던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윽고 우 알렉시우스는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