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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자서전「칠층산」에서 머튼은 목적없이 이 세상에 사로잡힌 생활로부터
수도원의 골방에 갇힌 “자유”의 삶을 얻기까지의 여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의 온갖 쾌락, 흥분, 열정을 다 경험하고 살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환상이라고 하며 거부하였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진실이라면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단지 모든 것을 움켜쥐고,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경험을 다 해 보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벌써 행복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요람으로부터 지금까지만 해도 나는 영적인 백만장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 자신을 채우면서 나는 오히려 비어 갔다.
움켜쥐면서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을 게걸스럽게 삼키면서 나는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고뇌와 혼란으로부터 머튼은 삶에 더 깊은 목적과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살아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현존과 실제로 가득찬 세상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동안 머튼은 이미 영성작가로서 명성과 인기를 누렸다.
1968년에 죽은 후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의 인기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수많은 독자들 중에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그를 따라 수도원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에 가지 않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경험에 동감하고 있다.
그들은 행복을 찾는 여정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길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충만한 삶으로 초대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 초대는 세상이 정해 놓은 틀을 넘어서는 초대이다.

새벽별

성인들의 행복은 억제와 자기훈련을 더 늘이는 것에 있지 않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이끌리게 하는 성인들의 가장 좋은 점은 그들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가에 있지 않고,
그들의 행동과 태도 속에서 빛나는 “영혼의 기쁨”에 있다.
그들의 무거움이 아니라, 담백함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이 남긴 말씀 중에 한 젊은 수도승과 연장자간에 이런 대화가 있다:
“로트 원장이 죠셉 원장에게 와서 말했다,
‘아버지! 저는 할 수 있는 만큼 겸손하게 규칙을 지키고 단식, 기도, 묵상,
그리고 관상 속의 침묵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제 마음 속의 생각을 깨끗이 하려고 애썼습니다.
이제 제가 더 이상 무엇을 해야합니까?’
연장자는 대답하기 위하여 일어섰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뻗쳤다.
그래서 그의 손가락은 마치 열 개의 불이 켜진 등불처럼 보였다.
그는 말했다, ‘그러면 그냥 불 자체로 변해 버리면 어떨까요?’”

모든 사람은 사막의 은둔소에서 고행을 한다든가 트라피스트회 수도승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길들이 우리의 길이 아니라 해도
세상의 흐름대로 표류하는 것에 저항해야 하는 도전은 여전히 남는다.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것,
우리의 마음을 생명의 원천에 모으는 것,
그리고 죽기 전에
우리가 참다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숙제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도 성인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생명과 빛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토니오 성인이 즐겨 말한 것처럼,“옛 교부들은 사막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들은 의사가 되었고, 다시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을 온전하게 만들었다.”

                           ★

헨리 데이비드 쏘로우는 일상과 관습의 유혹과 잠식에 매우 민감하게 깨어 있었다.
그것들은 우리 모두를 몽유병 환자로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얼마나 쉽게,
그리고 무감각하게 우리는 어떤 특정한 길에 빠지고,
우리 자신을 위해 마음대로 길을 뒤틀리게 만든다.
지구의 표면은 사람들의 발에 의해 부드럽게 되고 길들여진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그런 길들을 따라 표류한다.
세상의 고속도로는 얼마나 낡아빠졌고 먼지투성인가.
전통과 적응의 바퀴자국은 얼마나 깊숙이 새겨져 있는가!”

그러나 쏘로우는 이러한 무기력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
월든」에서 그는 극적인 영상으로 성찰을 마무리한다.
그것은 “한 농부의 부엌에 60년 동안 놓여 있었던 사과나무로 만든 오래된 식탁의 마른 잎에서
기어 나온 강하고 아름다운 작은 벌레”의 모습이다.
이 벌레는 식탁으로 쓰여진 나무가 살아 있었던 수십 년 전에 까놓은 유충 알에서 부화되었다.
쏘로우는 말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누가 부활과 불멸에 대한 믿음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운 벌레”는 우리들의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인 일상 아래에서
생명의 영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적절한 상징이다.
모든 것이 차갑고 둔하고 마비된 것 같이 보여도 한 겨울의 둥근 튤립뿌리처럼,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잠재력은 결코 죽지 않고 단지 잠들어 있는­ 생명을 깨우쳐 준다.
쏘로우의 말들은 깨어나라는 오래된 도전을, 무기력의 또아리를 흔들어 풀어버리라는,
더 충만하게 살아있기를 배우라는 도전처럼 메아리친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만 새벽은 오는 법이다”라고 그는 썼다.
“더 많은 날들이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 “태양은 다만 새벽 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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