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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이순이 (루갈다)

2011.09.13 14:28

기도방지기 조회 수:1335

||0||0이순이 (루갈다)

이순이는 양반 가문 출신이며 전주 이씨 경량군의 후손으로 178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윤하, 어머니는 안동 권씨였다. 그녀의 친가와 외가는 모든 실학의 대가들로 일족을 이룬 이름 높은 양반 가문이였다.

실학의 선구자인 지봉 이수광은 그녀의 9대 조부요, 실학의 거두인 성호 이익은 외증조부이고 성호학파 중 친서파의 우두머리인 권철신은 외숙부였다.

그녀의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아버지 때부터였다. 그녀의 아버지 이윤하는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권철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권철신이 주관한 천주교 교리 연구 모임의 효시인 주어사 강학(1777년)에도 참석하였다. 이윤하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자 마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주역인 이승훈과 권일신은 그의 처남이었다.

이순이는 유아 때 루갈다라는 세례명으로 아버지와 함께 영세하였다. 루갈다가 12살 되던 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그때부터 홀어머니(권철신과 권일신의 누님) 밑에서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녀가 14세 되던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한국의 첫 선교사로 입국하자 한국의 신도들은 처음으로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고, 비로소 첫 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어른 신도들도 성체를 모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교리 교육이 갖추어져 있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어린 그녀가 4일 동안 두문 불출하며 성체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그 당시 신도들에게 유포되어 있는 한글로 쓰여진 교리서들을 통독하였다.  

  그 결과 그녀의 신심과 교리 지식의 정도는 성사받기에 충분하다고 신부에게 인정받았고 그녀의 소원은 마침내 성취되었다.  첫 영성체의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루갈다의 이 감격은 성체를 받아 모신 사람은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고 공경하며 자기의 영혼과 육신을 예수께 드려야 한다는 교리의 실천을 촉구하였다.
그녀는 영성체의 효과를 거룩하게 보존하고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하여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의 동정을 바치며, 양반으로 누릴 수 있는 영화와 향락을 포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동정을 지키기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 있었다. 당시 유교 사회의 풍습으로는 지체 높은 양반집의 규수가 결혼하지 않고 동정생활을 한다는 것이 바로 죄악이었기 때문이다.

루갈다의 뜻이 주문모 신부에게 전해지자, 주 신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하여 동정생활을 결심하고 있는 한 젊은이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전라도의 첫 사도이며 최초로 이 고장에 복음을 전한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요한)이었다, 당시의 사회 풍습을 잘 알고 있던 주 신부는 성년한 청춘 남녀가 사회의 지탄을 받지 않으면서 무난하게 동정생활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라는 형식을 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유중철과 이순이에게 결혼을 하고도 서로의 뜻처럼 남매처럼 지낼 수 있겠는지를 다짐하고, 믿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난관이 뒤따랐다. 이순이의 집안과 유중철의 집안을 비교할 때, 유중철의 집안도 양반이요 호남 굴지의 부호였지만, 이순이의 집안보다는 지체가 낮았으므로 외교인의 친척들은 완강하게 혼인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이의 어머니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신앙이 돈독했던 이 어머니는 사람을 신분상의 지위나 문별로 평가하지 않고 영혼의 선악 상태로 평가하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신랑감이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급 인물로 활약하고 있는 심심 깊은 유항검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딸을 맡기고도 싶었던 것이다.

권씨 부인은 가문의 강경한 반대를 무릎쓰고 1797년 결혼식을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이순이는 전주 초남리 유중철의 집으로 가서 시부모 앞에서 동정생활의 뜻을 밝히고, 동거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효성을 다하여 시부모를 섬겼고, 형제간의 우애는 물론 집안의 많은 노복들에게도 애덕을 베풀었다.

두 사람은 순교할 때까지 4년을 동거하며 남매처럼 사는 동안 견디기 힘든 본능의 유혹에 10여 차례 시달리며 동정을 깨뜨릴 뻔하기도 하였다. 루갈다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 내외 처음 만나던 날에 서로 수절하기로 맹세하니, 평생 근심이 일시에 풀려 4년동안을 형제같이 살며, 그 사이 혹독한 유감이 몇 번 있어 대개 열번이나 무너질 뻔 했사오나, 공정하올 성혈 공로로 계교를 물리쳤나이다....”
이 한 쌍의 부부가 동정생활의 장한 의지를 보호한 힘은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었다. 인간의 본능까지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준 이러한 사랑은 그녀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와 영혼의 구원에 최후의 목적을 두게하는 반면, 현세와 세상 사물을 물거품처럼 여기게 하였으므로, 그녀는 세상의 어떤 것에도 애착을 두지 않고 자유스러울 수가 있었다.

1801년 3월 전라도에 박해가 일어나자 시아버지 유항검은 천주교의 괴수라 하여 체포되었다. 이때 그녀의 남편 유중철도 함께 끌려갔다. 유항검은 문초 과정에서 외국인 선교사와 내통하였을 뿐 아니라, 서양 선교사들을 한국에 데려오라고 화력을 갖춘 서양 선박을 불러 들이려 음모를 꾸민 주모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그의 처형이 결정되자, 전라 감사는 연좌형으로 남은 가족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전 재산을 압수하였다.

유항검은 1801년 9월 17일(양력 10월 24일) 대역 부도죄로 능지처참되었다.
루갈다는 옥중에서 친정 어머니와 친정 언니, 올케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지를 써 보냈다. 이 편지들은 죽음을 슬퍼하는 단장의 글이 아니라 어머니와 혈육들에게 신앙의 위로와 용기를 주는 신앙고백서였다. 이 편지들은 그녀의 생애가 하느님을 대부모로 섬기며, 순교를 준비하며 살아온 생애였음을 확실히 전해 주고 있다.

  그녀의 신앙 행위는 자신이 효부와 효녀로 닦아온 효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효도가 부모를 극진히 공경하고 지극한 열정으로 사랑하고 부모의 뜻을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덕을 뜻한다면, 그녀는 바로 이러한 효도의 정신을 그대로 하느님께 연장시켜 실천하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한 나머지 누우나 앉으나 간절한 소망은 오로지 주님을 위해 생명을 ?T는 치명의 은혜였다. 순교를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사랑이요,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는 일이므로 최고의 은총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형벌을 받으면서 살이 터지고 유혈이 낭자하는 고통을 당하였지만, 은혜로 여기며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 고통을 고난과 능욕을 받으신 구세주를 닮은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도 기회 있는 대로 선을 행하며 공로를 세우고 작은 결점마저 큰 죄처럼 피하며 통화하였다.
또한 그녀는 언니들에게 자기가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알고 살아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말하며 자기가 죽거든 서러워하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녀는 시어머니 신희, 시숙모 이육희, 시동생들인 유문철과 어린 세자녀, 시사촌 동생 유중성과 같은 감옥에 있었다. 그러던 중 10월 9일(양력 11월 14일), 시동생 유문철(요한)은 유중철이 있는 감옥으로 옮겨져 두 형제는 교수당하였다.

전라 감사는 10월 13일, 형법에 따라 남은 가족들을 멀리 유배시켰다. 그러나 이들이 유배지로 향하여 100여 리쯤 갔을 때 유배 명령이 변경되어 어린 세 자녀만이 유배지로 향하게 되었고, 나머지는 다시 옥에 갇히게 되었다. 전라 감사는 다시 하옥된 사람들을 심문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도 루갈다는 천주를 섬기며 죽겠노라고 자기의 결심을 재차 밝혔다. 감사는 그녀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매질을 하고는 큰칼을 씌워 하옥하였다.

12월 28일9양력 1802년 1월 31일), 사형날이 왔다. 루갈다와 신희, 이육희, 유중성은 숲정이 형장을 향하여 걸어갔다. 가는 동안 어린 세 자녀를 귀양보낸 시어머니 신희는 자식들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였다. 루갈다는 시어머니가 평화로운 마음으로 순교할 수 있도록 신앙을 격려하며 위로하였다. 형장에 도착하니 망나니들은 관례대로 죄인들의 웃옷을 벗기려 하였다. 그녀는 휘광이에게 자기 몸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말하고 스스로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 조용히 머리를 도끼 밑에 놓았다.
그녀의 목이 잘려지자 하얀 젖빛 피가 용솟음치며 쏟아져 흘러 나왔다.
그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참 고 : 루갈다의 친정 역시 순교자의 가정이다. 그녀보다 두 살 위인 오빠 이경도(가롤로)는 그녀가 순교하기 이틀 전 서울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고, 그녀의 남동생 이경언(바오로)은 1827년 전주에서 누이의 모범에 따라 옥중 순교하였다. 그런데 이 삼남매는 각각 옥중수기를 남겼으며 한국 신도들은 이들의 옥중 수기를 영적 독서처럼 소중하게 읽어 오고 있다. 이순이는 한국 순교자 중에서 뛰어난 순교자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녀가 남긴 신심은 한국 신도들의 큰 빛이 되고 있다.


(출처 : 치명자산 홈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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