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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 유중철 (요한)

2011.09.1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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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유중철 (요한)

   유중철은 유항검(아우구스틴)과 신희를 부모로 하여 1779년 전주 초남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항검은 1784년 가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후 즉시 세례를 받아 전라도 지방의 첫 신도가 되었다. 그리고 덕망이 높은데다가 전라도 굴지의 부호였으므로 교세를 넓히는 데 그의 재력은 큰도움이 되었다.

유중철은 여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세례를 받고 덕망 높고 신심 깊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사람들은 그의 사람됨을 평가하기를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과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분에 충실할 뿐 아니라 대부호의 큰아들로서 부귀 영화를 탐할만 하였지만, 오히려 사치와 허영을 가벼이 여겨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점잖고 정중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는 교리를 깊이 연구하며 교회의 정신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하는 아버지 밑에서 신심을 닦아갔다. 그러나 그가 언제부터 어떠한 동기로 동정생활을 결심하였는지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그의 신심 내용 역시 그의 아내인 이순이의 옥중 수기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유중철이 주문모 신부를 처음 만난 것은 1795년 4월이었다. 주 신부는 이존창과 유중철의 숙부 유관검의 안내로 고산 저구리(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에 왔었다. 그는 그 곳에서 여러 날을 머물며 성사를 집행할 후 전주로 가서 전라도 선교의 책임자인 유항검을 만났다. 그리고 유항검의 집에서 성사를 집행하며 한 주일 가량 머물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주신부가 유항검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유항검과 교리와 교회 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였을 것이고, 유중철은 주 신부에게 자기는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기 위하여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서울에서 첫 영세식이 있은 다음에 이순이가 주 신부에게 성모 마리아처럼 동정을 바치겠다고 의사를 밝혔을 때에 주 신부는 즉시 그녀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유중철이 머리에 떠올랐다.

주 신부는 이순이의 사람됨과 신앙의 깊이를 높이 인정하였듯이 유중철도 믿음직하게 여겼다. 그러나 유교 사회에서 남자가 독신생활을 한다는 것을 멸륜 행위로 단죄하므로 이순이와 결혼식을 올리게 하여 서로 그들이 바라던 대로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처럼 동정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중철에게 그의 결심이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는지 다시 확인하였다.

그러나 유중철이 아무리 동정생활을 원한다 하더라도 가족 중심주의의 유교 사회에서는 모든 결정권이 가장인 아버지에게 있었으므로 유항검의 허락이 없는 한 절대로 불가능하였다. 더구나 조상을 섬기고 가계의 존속을 소중하게 여기는 전통 사회에서 가통을 이어야 할 장남이 자녀를 포기하는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것은 패가 망신의 불효였다. 그러나 아버지인 유항검은 자식이 결심한 신앙의 결단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순이 가정이 혼인을 어렵게 결정하였듯이 유중철의 부모 역시 심한 갈등을 해소한 후에야 두 사람의 동정 부부 생활을 승락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유중철은 1797년 서울 이순이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이순이가 1년 후 시집인 전주 초남리에 오자 두 사람은 부모를 모시고 동정 서약을 하였다.
유중철과 이순이는 십자 고상 앞에서, 두 사람은 한 마음 한 뜻을 이루어 끝까지 동저을 지키다가, 한날 함께 하느님을 위하여 치명하기로 맹세하였다. 그러나 결심은 굳고 소망은 간절했지만 육신의 본능은 연약했다. 그래서 그들은 가슴을 찢는 유혹을 수없이 견디어 내야 했다. 그들은 더욱 하느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쳤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유중철은 4년을 동거하면서 동정 서약을 파기할 뻔한 위기를 10여 차례 견디어냈다. 1800년 음력 12월 어느날이었다. 유중철과 이순이는 견디기 어려운 정욕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살얼음판을 걷거나 백척 절벽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떨렸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유혹을 견딜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시라고 애절하게 간구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고 동정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 후 두 사람의 신뢰심은 금석처럼 굳어졌고, 두 사람의 믿음과 사랑은 날이 갈수록 무게를 더하게 되었다.

1801년 3월, 유항검이 천주교의 죄수로 체포되었고, 아들인 유중철도 같이 구속되었다. 구속 후 그는 치명할 때까지 여덟 달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옷의 차입을 금지 당했었으므로 옷 한번 갈아 입지 못했고, 끌려갈 때 입은 겨울 옷을 입고 지냈으며, 목게 큰 칼을 쓴 채로 지내다가 죽을 때에야 비로소 벗었다. 그 동안 유중철의 옥바라지는 그와 함께 처형된 동생 유문철이 해왔었다.

10월 9일 아침이었다. 이순이와 함께 옥에 갇혀 있던 시동생 문철을 큰 옥에 있는 형 중철과 함께 가두겠다고 옥졸이 데려갔다. 그런데 한 시간쯤 후 남편 유중철과 시동생 유문철이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중철의 나이가 23세였다.

그는 이순이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그러나 이순이는 유중철이 죽음을 잘 준비하여 선종하였는가 걱정되어 억만 개의 칼이 그녀의 흉중을 찢는 듯 마음이 산란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통해 죽은 유중철의 옷에서 아내인 자기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고, 그 쪽지에서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순이는 남편이지만 오라버니라고 불렀던 유중철을 이렇게 평하였다. “그는 세속 정신을 벗어난 진짜 교유였다. 그는 덕을 닦기에 부지런하고,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성실하게 살아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자기가 바라던 대로 순교하였으니 모든 소원이 이루어졌다.”

참 고 : 유중철의 아내이며 누이인 이순이의 높은 명성의 그늘에 가려 그의 정신이 빛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유중철이 지켜 주지 못했다면 이순이의 믿음과 그 뜻이 아무리 고결하다해도 찬란한 생애로 순교하는 이순이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유중철은 마치 성모 마리아 곁에서 그녀를 도우며 겸손하게 일생을 보낸 성 요섭과 같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출처 : 치명자산 성지 홈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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