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3>67. 최여겸 마티아 (1763~1801년)
2011.07.16 17:09
||0||067. 최여겸 마티아 (1763~1801년)
전라도 무장의 양반1) 집안에서 태어난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는 일찍이 윤지충(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또 결혼한 뒤에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당시 그의 처가는 충청도 한산에 있었는데, 그가 이존창을 만난 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후 무장으로 돌아온 마티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또 자신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이웃에게 전파하는 데 노력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마티아는 일단 한산 처가로 피신하였다. 이때 무장에서는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그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결과 마티아는 4월 13일 한산에서 체포되어 일단 그곳에서 문초를 받고, 감사의 명에 따라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최여겸 마티아가 무장 관아에 이르자, 관장은 즉시 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문초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어떠한 형벌로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도 마티아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열심한 신자 한정흠(스타니슬라오)과 김천애(안드레아)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2)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3) 이에 따라 마티아는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곳 개갑장터(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형조에서 최여겸 마티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여겸은 처음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이후로는 이존창을 따르면서 교리를 독실히 믿고 익혔다. 또 그 교리로 남들을 속여 미혹시키고, 널리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신도 망치고 남들도 망치게 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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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여겸의 신분을 ‘평민’으로 기록한 경우도 있다(황사영, <백서>, 74행).
2)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1858년 필사
정리), M.E.P. 소장, p. 122.
3) 순조실록 권3, 순조 원년 7월 13일.
4) 사학징의 권1, p. 170, 최여겸.
전라도 무장의 양반1) 집안에서 태어난 최여겸(崔汝謙) 마티아는 일찍이 윤지충(바오로)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또 결혼한 뒤에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당시 그의 처가는 충청도 한산에 있었는데, 그가 이존창을 만난 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후 무장으로 돌아온 마티아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중하였다. 또 자신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이웃에게 전파하는 데 노력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마티아는 일단 한산 처가로 피신하였다. 이때 무장에서는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그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결과 마티아는 4월 13일 한산에서 체포되어 일단 그곳에서 문초를 받고, 감사의 명에 따라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최여겸 마티아가 무장 관아에 이르자, 관장은 즉시 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문초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어떠한 형벌로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도 마티아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열심한 신자 한정흠(스타니슬라오)과 김천애(안드레아)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2)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3) 이에 따라 마티아는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곳 개갑장터(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갑촌)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형조에서 최여겸 마티아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여겸은 처음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이후로는 이존창을 따르면서 교리를 독실히 믿고 익혔다. 또 그 교리로 남들을 속여 미혹시키고, 널리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자신도 망치고 남들도 망치게 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아깝지 않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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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여겸의 신분을 ‘평민’으로 기록한 경우도 있다(황사영, <백서>, 74행).
2)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1858년 필사
정리), M.E.P. 소장, p. 122.
3) 순조실록 권3, 순조 원년 7월 13일.
4) 사학징의 권1, p. 170, 최여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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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아아 위대하신 최여경 마티아 순교자님
바람앞에 등불처럼 약한 저희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