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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이성례 마리아

2011.06.19 19:00

기도방지기 조회 수:1356

||0||0이성례 마리아
최경환 성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는 이존창 집안출신이며 홍주고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8세에 최경환 성인과 결혼하여 다락골에 살면서 맏아들 최양업을 낳았고 서울로 이사왔다가 여러곳으로 옮겨다니면서 지극히 헌신적으로 남편을 도왔고, 불평불만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일이 결코 없었습니다.

산 속에서 그 어린 자식들이 배고픔과 피로로 기진맥진한 것을 본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때에는 이 세상의 짧음과 후세 생명의 영원함을 환기시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그들앞에 보여주었습니다. 1839년 7월 남편과 함께 잡혀 포도청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며 곤장을 300대 이상 맞았습니다. 그러나 포장 앞에서 잠시도 굴하지 않고 다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당시 감옥이란 마룻방으로 되어있고 널판문이 있어 그곳으로 겨우 빛이 통과할 정도여서 겨울에는 무섭게 춥고 여름에는 찌는 듯이 더웠습니다.

대역죄인처럼 학대받고, 먹는 것이라곤 아침 저녁으로 주는 한 주먹의 조밥뿐이며 물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건강한 사내라도 2-3주일 후면 파리하게 여위어져 뼈가 나오고 가죽만 남게 되었습니다. 뮈뗄민 주교는 "옥중의 죄수는 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해골이 걸어다니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며 다블뤼 안신부님은 "옥중생활은 고문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상처로부터 흐르는 피와 고름 때문에 멍석은 푹푹 썩어가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병이 돌기 시작하여 하루에도 2-3명씩 죽어 나갔습니다.

 가장 무서운 형벌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습니다. 교우들은 이 기갈을 참지 못해 항복하는 예가 적지 않았으며 배고픔을 참다 못해 썩어빠진 멍석자락을 뜯어 씹기도 하고 옥안에 들끓는 이를 한 웅큼씩 잡아먹기도 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굶주림과 고문으로 말라 빠지고 상처가 난 이 마리아의 젖꼭지에서 젖이 나올 리가 만무했습니다. 데리고 들어간 3살짜리 젖먹이 스테파노가 엄마의 젖이 끊어지므로 젖을 빨다가 굶어 죽어갔습니다. 엄마로서 아들을 굶어죽이게 되니 그 비통함은 얼마나 컸겠는가? 이런 실성한 상태에서 그녀는 "나는 배교하겠노라"고 말합니다. 이 한마디 때문에 이성례 마리아는 복녀위에 누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성례 마리아는 감옥에서 풀려나온 이후, 하느님과의 약속, 남편과의 약속도 저버린 몹쓸 죄인이 된 자신의 처지, 한없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중 큰 아들 양업이 마카오에서 신학 교육을 받는다는 사실이 형조에 알려져 다시 감옥에 수감되게 된다. 감옥으로 들어오면서 네 아이를 불러놓고 "절대로 성모님과 천주님을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지내며 떨어지지 말고 맏형이 올때까지 용인 큰 아버지에게 가서 살아라. 그러면 맏형이 거두어 줄 것이다"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네 형제는 용인으로 가지 않고, 어머니가 떨어지지 말랬다고 넷이 노끈으로 서로 허리를 묶고 구걸을 하며 감옥에 들어간 어머니를 공양하였습니다. 하루는 형리를 통해 인절미가 들어왔는데 손때가 새까맣게 묻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성례 마리아는 그것이 누구의 손때인지를 알았습니다. 어린 자식들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먹고 싶은 걸 참고 어머니에게 넣어준 것입니다.

사형 집행일이 다가왔을 때 둘째 아들 야고보를 불러 이제 어미가 죽게 되었으니 너희 모두 절대로 어미의 죽는 모습을 보지 말고 용인에 가라고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을 나온 둘째는 그 날 밤 휘광이를 찾아가 그동안 동냥해서 모은 약간의 돈과 쌀을 휘광이에게 주며 "우리 엄마 이제 죽게 되었는데, 죽을 때 아프지 않게 목을 단박에 잘라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 무지막지한 휘광이도 눈물을 흘리며 밤새 칼을 새파랗게 갈았다고 합니다.

이튿날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자녀들에게 오지 말라고 했지만 자녀들은 숨어서 '엄마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 형장을 찾아들었습니다. 정말 휘광이의 한 칼에 어머니의 목이 떨어지자 이를 지켜보던 네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무명저고리를 벗어 하늘로 던지고 손뼉을 치면서 "우리 엄니 목이 단칼에 떨어졌다. 이제 우리 엄마 천당에 가셨다"고 그렇게들 좋아하는 데 천주교 신자들 잡아 죽인다고 구경 나왔던 외인들마저도 그 기막힌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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