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타이틀1

슬라이드 타이틀2

슬라이드 타이틀3

성녀 김 마르타

2017.04.01 18:03

기도방지기 조회 수:242

 

그의 생활은 퍽 괴로워서 어떤 때는 자신이 애긍 받은 것 때문에

마음 쓰라림을 뼈저리게 느끼곤 하였다.

하지만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했다.

 

당신들은 천주교인을 찾지요?

우리를 결박해서 옥에 가두시오.

 

 

성령님  영원한 사랑이여 !

저희를 가르치시어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게  하소서 !

 

주님 믿음 약한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님  저희가   성녀 김성임 마르타의  믿음을  본받게  하소서 !

자수하여 주님을 증거하였던 성녀 김마르타시여  불쌍한 저희위헤 빌어주소서 !

 

 

9.18.jpg

 

인천 부평에서 태어난 성녀 김성임 마르타는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결혼에 한 번 실패한 후 상경하여 맹인 점쟁이와 재혼했다. <기해일기>를 보면 김성임 마르타는 부평(富平)댁이라고 불렸다고 하는 데, 이는 부평사람과 결혼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재혼한 집안에 원래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있어 김 마르타는 그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소경 남편을 여윈 후 김 마르타는 이단에 동조한 것을 통회하고, 죽은 소경 남편의 재산이 다소 남아 있었지만 그 집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진해서 아주 가난뱅이가 되었다 한다.

그 후 의식을 돌보지 않고 이집 저집을 전전하면서 교우들의 애긍으로 살아나갔는데 김 마르타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여러 가지로 교우들의 일을 거들어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생활은 퍽 괴로워서 어떤 때는 자신이 애긍 받은 것 때문에 마음 쓰라림을 뼈저리게 느끼곤 하였다. 하지만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했다.

그러나 언제나 온화하고 천주께 의탁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김 마르타는 떠돌이 신세로 지내다가 이매임의 집에 살고 있었는데,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순교를 결심, 4월 11일에 함께 있던 이매임, 허계임, 이정희, 이영희, 김 루시아 등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졸들이 믿지 않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때, 묵주를 보여주면서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시키자 곧 결박지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포청에 나타난 김성임 마르타는 다섯 차례나 주리형을 받아 팔다리를 쓰지 못했지만 견뎌냈고, 형조에서 다시 한 차례의 형문을 이겨냈으니 형상이 태연하고 대답이 한결 같았다. 김 마르타는 결국 이 자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는 1839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들과 참수 치명하니 성녀의 나이 50세였다.

묵상 : 예수 · 마리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성녀 김아기 아가타, 평생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던 성녀 우술임, 처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늦게 믿음의 눈을 뜨게 된 성녀 한아기, 이웃 간에 화목하게 지내어 좋은 모범을 보였던 성녀 김장금, 인내와 극기로 살아온 김성임, 이상 다섯 분의 성녀는 모두 과부로 어려운 처지에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신 분들이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이나 자신의 처지 또는 교리지식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은 언제나 부수적이고 2차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 그 자신의 마음과 성의와 노력에 달려 있다. 이런 것을 입증해 주신 성녀들이 오늘 우리가 만난 분들이다.

예수 · 마리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분이 순교할 수 있음은 하느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신비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CLOSE